"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경기를 제압한다.” (<슬램덩크> 중에서)

 

[공감신문] 얼마 전 아는 오빠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었다. 거의 1년 반만이었나 보다. 평양냉면 두 그릇에 제육을 시켜놓고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먹다가, 오빠가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요즘에 만나는 사람은 없고?”

“네.”

1년 반 전에는 만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오빠와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리고 난 덧붙여 이런 얘길 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간 거 같아요. 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요.”

그랬다. 사실 1년 반 전에 만났던 사람은 내가 이전에 호감을 갖던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와 꽤 오랜 기간 만났었다. 당시 진심으로 그를 좋아했었다, 결국엔 끝이 났지만. 그 얘길 듣자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너의 리바운드였구나.”

오빠의 유학 시절 미국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의 여자 스타일은 학창시절부터 꽤 확고했다고 한다. 작고 아담한, 자기보다 어린 여자. 근데 어느 날 그런 여자와의 뜨겁던 연애가 끝난 후, 정말 색다른 여자를 애인이라고 친구들에게 소개했단다. 키가 컸고 아담하지 않았으며, 나이도 그와 비슷한 또래였단다.

처음에 오빠의 친구들은, ‘너 지금 좀 정신을 놓은 거 아니냐’, ‘네가 얼마나 만날 것 같으냐.’고 나무랐단다. 그 여자분이 별로라서가 아니라, 갑자기 좋아하던 여자 스타일이 확 바뀐 친구가, 혹시나 그 여자분께 실수라도 할까 하는 마음이 더 컸었다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전에 만났던 여자에게 받은 상처 때문인지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하지만 역시 남녀 사이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둘은 꽤 오래 진지하게 연애를 했단다. 주변 사람들은 ‘와 역시 인연은 따로 있나 보다’, ‘결혼까지 가겠다’고 생각했었단다. 그리고 곧, 둘은 헤어졌고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역시 나한텐 작고 아담하고, 나보다 어린 여자가 어울려.”

오빠는 그 친구분이 만났던 키 크고 아담하지 않은 여자분이나 내가 이전에 만난 사람 모두 ‘리바운드’라고 표현했다.

리바운드(rebound). 흔히 스포츠, 특히 농구 경기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다. 사전적으로는 슛을 한 공이 바스켓 안에 들어가지 않고 림이나 백보드에 맞아 튕겨 나온 것을 잡아내는 기술을 뜻한다. 여자 독자 분들을 위해 더 쉽게 설명하자면, 슛! 을 했는데 들어가지 않고 튕긴 공을 다시 잡는 것이다.

농구 경기에서 리바운드는 상당히 중요하다. <농구의 탄생, 그 역사와 에피소드>(손대범 저)라는 책에는 ‘리바운드는 승리자를 만들어낸다’고 쓰여있다. 농구를 잘 몰라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법한 로드맨 역시 리바운드를 잘 잡아냈었다고. 우리가 알만한 대단한 선수들이 모두 그러했었다. 하긴, 바로 밑에서 튕겨져 나온 공을 잡아내면 득점을 하기 더욱 쉽지 않을까?

데니스 로드맨

리바운드를 잘하기 위해서 이 책에서는 네 가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바로 포지션(position), 즉 위치다. 두 번째는 스탠스(stance), 그러니까 균형 잡힌 자세. 세 번째는 어프로치(approach), 어떻게 접근하느냐. 그리고 네 번째가 바로 리커버리(recovery), 회복이라고 한다. 다음 동작으로의 연계가 빨라야 한다고.

우리는 흔히 연애를 ‘게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러브게임’이라는 표현도 종종 쓴다. 사랑은 게임 같지 않다. 내가 혼자 하는 사랑은 늘 져주기만 할 텐데 그게 어떻게 게임이 되겠나? 게임이 안되지! 혹은 시작도 못하는 게임도 있으나 거기에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는 게임이 될 수 있다. 시작되었고, 둘만의 룰(rule)이 있으며, 두 사람이 그러기를 동의한 것이다. 때로는 누가 관전을 하기도 한다.

농구에서 공을 바스켓 쪽으로 슛을 하는 건, 당연히 득점을 내고자 함일 것이다. 그것이 튕겨져 나오기를 상대편이 아니고서야 누가 바랬겠는가? 연애 역시 이럴 수 있다.

어떤 연애는 슛까지 가지 않고 드리블 정도에서만 끝날 수도 있다. 그럼 튕겨져 나올 일도 없겠지. 하지만 모두의 눈에 그게 ‘슛’으로 까지 이어지는 게 보인다면, 기대를 걸 만하지 않나! 득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물론, 튕겨져 나올 수도 있겠지.

어쩌면 사실 연애라는 게임에서, 튕겨져 나올 것이 뻔한 슛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혹은 내가 그런 공일 지도. 누군가의 회복을 위하여, 그렇게 쓸데없이 제대로 노력하고 있단 얘기지. 나 역시도 누군가의 리바운드였을 수도 있다. ‘나’같은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지 않던 남자가, 그저 이게 들어가지 않을 공임을 알면서도 나를 만나는 것이다.

이런 남녀 관계의 리바운드에서도 농구 경기와 같은 모습들이 보여진다. 여기서도 포지션, 즉 위치가 중요하다. 대부분 적당한 때- 그러니까 헤어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시야를 넓힐 만 할 때에 근거리에 있더라. 두 번째 스탠스, 균형 잡힌 자세도 중요하지. 내가 상처받은 것 같다고 덥석 다가와도 별로이고 어느 정도 호감과 호기심이 균형 잡힌 감정을 끌어내어야 한다.

세 번째 어프로치. (사실 이건 좀 입장이 다른데) ‘공’이 적당한 스탠스에 있으면 상처받은 선수들이 알아서 공을 찾아간다. 네 번째가 바로 회복. 그렇다. 공이 튕겨져 나온 후? 선수는 바로 원래의 자신의 모습으로 회복한다. 작고 아담한 여자를 좋아하던 남자로, 또 다시 남자의 외모를 포기하지 못하던 지해수로.

누가 잘 던졌고 못 던졌고, 혹은 누가 잘났고 못났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슛을 던지는 것처럼, 그냥 각자의 스타일이 다른 거다. 슬픈 건, 그렇게 슛까지 갈만큼 잘 만났는데도 애초에 리바운드 될 공은 튕겨져 나온다는 사실이고, 더욱 슬픈 건- 리바운드를 잘해야 승리를 한다는 거다. 그게 회복의 방법이라면.

우린 누구나 한번쯤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리바운드였던 적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욕할 필요는 없다. 그는 당신이, 혹은 내가 리바운드 될 공이었는지 모르고 던진 것이며, 심지어 하얗게 불태웠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면!

내일의 죠

충실했고 좋은 사람이었던 예전 연인에게 ‘리바운드’라는 단어를 쓰기엔 너무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 스스로도 놀라운 것은 너무도 사랑했던 시간에 비해 회복이 정말 빨랐다는 사실이다. 정말 성공적인 다음 슛을 던지기 위하여, 그는 그렇게 튕겨져 나온 것이었을까? 우리 두 사람은 처음 시작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걸까? 제대로 사랑을 가꿔나가지 못했으면서 이런 핑계나 대고 있는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긴 하다.

중요한 건 어떤 게임, 어떤 관계에 있어서든 시작을 하면 최선을 다해야 후회가 없단 거다. “’졌던 적이 있다.’라고 하는 것이 언젠가 큰 재산이 된다.”는 <슬램덩크>의 명대사가 있더라. 패배는 씁쓸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이의 뒷모습은 멋지지 않나.

'공격 리바운드는 우리가 공격하면서 실수한 슛을 다시 잡아내는 것이다. 이 경우 공격할 기회가 한번 더 생기므로 우리 팀에게는 절대 유리하다. 그 때문에 세컨드 찬스 득점이 성공할 경우에는 4점의 효과가 있다는 말도 있다. 수비 리바운드는 상대가 실수한 공을 잡아내는 것이다.’ (<농구의 탄생- 그 역사와 에피소드> 중에서)

사실 이렇게 보면 리바운드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회복된 누군가에겐 더 멋진 득점의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 혹은 내 입장이 ‘상대가 실수한 공’이었는데 그걸 어느 멋진 누군가가 받아주는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 ‘충분히 예뻐 그런 남자 때문에 상처받아 울기에 넌 너무 아름다운걸-’ 이런 노래 가사처럼! 오, 제발 그렇게 다정스러운 남자가 다시 나의 리바운드가 되지 않아야할 텐데! 이것 봐, 우린 누군가의 리바운드가 되기 너무 쉽다니까?

슬램덩크

나이가 든다는 걸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랑에서 누가 이기고 진다는 게 별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당시엔 표면적으로 진 것 같아도 나중엔 내가 더 미련 없이 훌훌 마음이 편해질 때도 있고, 당시엔 이긴 것 같아도 막상 이후에 누군가를 떠올리면 한쪽 가슴이 불편해질 때도 있다. 이기고 지는 거?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제일 중요한 건, 게임을 시작하는 것 아니겠어? 위에서 말했다시피 사랑을 한다고 다 연애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동의 하에 시작을 하고, 상대방을 파악하고, 밀고 당기고, 머리를 굴렸다가, 몸도 쓰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기회가 오는 것…! 그게 가장 값지단 말이지.

내가 가진 사랑은 어마어마하게 큰 데, 그런 사랑을 상대방에게 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 일생에 몇 번이나 더 경험할 수 있을까? 이미 다 소진된 건 아니겠지? 난 이미 회복되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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