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아스가 파하디

 

[공감신문] 원래도 극장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흥행 보증 수표를 내건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긴 처음이다. 지난주엔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 그리고 금주엔 장훈 감독의 <택시 운전사>를 보았다. 논란이 되고 있는 스크린 독과점이라던 지 역사적 사실 왜곡을 떠나, 그냥 개인적인 영화 취향에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두 영화, 특히 왜 <군함도>가 욕을 먹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 별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수많은 독자 여러분들이 그 이유를 아실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보려고 한다. 

영화 군함도 스틸컷

예전에 알던 어느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 유학을 떠났던 이 친구는 대학에서 강의를 듣던 어느 날, 미국이 얼마나 무서운 나라인지 느끼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그는 미국사에 대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 수업의 전반적인 내용이 ‘미국이 얼마나 ‘나쁜’ 나라인가‘에 대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 수업엔 상당히 많은 유학생들이 수강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미국에 학생비자로 유학을 가면 아르바이트도 불법이고, 정말 오로지 돈만 쓰고 가야 된다. 그럴 수 있다고 재정 상태를 증명해야만 비자를 내어준다. 그렇게 그 나라에 돈을 쓰러 온 유학생들에게 그 나라의 안 좋은 점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걸 허락하는 나라다. 마치 되게 잘생기고 돈 많고 친절한 ’나쁜 남자‘가, ’너 나 좋아하지 마라, 너만 상처 받는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며, 미국 어느 대학에서 그 수업을 들은 상당수의 학생들은 제때제때 등록금을 내며 학위를 마쳤을 것이다. 

다양한 시각을 가지는 것 좋은 일이다. 지식은 힘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믿는 진실이 사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그러나 다각도적인 시각은 다르다. 의심해보고, 꼬아보고, 지켜보고, 두고보아야한다. 나는 어느 이슈가 있을 때에, 인터넷 뉴스 댓글들이 이런 개인의 생각들을 방해하는 것 같아 무섭다. 우린 다양성을 인정해달라는 사회에 살면서도 자신이 그런 ‘소수’가 되는 것을 꺼린다, 아니 그것 때문에 주목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시각과 의견을 가지다가도 안전하게 획일화되고자 한다. 그런 누군가가 나왔을 때에 비난하다가 관심을 받고 곧- 그는 또 하나의 인플루언서가 된다. 누군가는 그가 밥 먹는 것만 봐도 욕을 할 것이고, 또 어떤 누군가는 그가 젓가락질을 잘못하더라도 스웩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2007년도 당시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 상반기에 보았던 영화 몇 편이 생각난다. 여름 방학 때 친구와 동네 극장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었다. 당시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별로 유쾌하진 않았었다. 이 영화는 5.18 민주 항쟁 당시의 광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마치 몇몇의 영웅 같은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벌어진 민주 항쟁인 것처럼 그려졌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대부분의 관객들은 울었지만 난 울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나서 못 울겠더라. 

이건 아니지. 난 당시 광주에 살지도 않았었고 누구의 말처럼 ‘그 당시를 겪어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그건 몇몇 영웅들이 주축이 된 항쟁이 아니었다.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온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유신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염원하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겨우 하나뿐인 내 댓글과 평점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냐만, 당시 포털 사이트에서 그 영화에 나쁜 평점을 쓰진 않았었다. 여름 방학 시즌에 맞춰 개봉한 그 영화는, ‘흥행하려고 나온 영화’ 같아서 그랬다. 말 그대로 ‘상업영화’였다. 5.18민주 항쟁에 대하여 한번이라도 상기시켜 주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복잡한 이야기로 꼬지 않고 저렇게나마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에 뜨거운 피를 흘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울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싶었다.  

사실 난 이 영화와 성격이나 장르가 무지 다르지만, 맘속에 비교 대상인 영화가 있긴 했었다. 난 그 전 해에 황석영 작가의 <오래된 정원>을 읽었고, 그 소설을 각색한 영화<오래된 정원> 역시 관람한 후였다. 이 영화 역시 80년대 독재정권에 탄압받던 현실을 다루었으며, 2007년 같은 해 1월에 개봉했었다. 지진희, 염정아 주연에, 임상수 감독. 당시 흥행은 못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상당히 좋아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화려한 휴가>가 드라마가 강해서 가려운 부분을 긁지 못했다? 아니, <오래된 정원>에는 더 많은 드라마가 있다. 두 권짜리 소설이 원작인 영화다. 더 속 깊고 애잔하다. 그러나 어쩐지 이 영화는 조용하며 서정적이다. 그리고 더욱, 차갑다. 차갑고 잔인하고 씁쓸하다. 

내가 무엇을 본들 감히 당시의 독재 정권의 탄압을 ‘좀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평생 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차갑고, 또 뜨거웠다. (개인적인 영화 취향으로 가장 좋아하는 유신 정권 시절 영화는 <말죽거리 잔혹사>이지만.) 그래서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감히 <오래된 정원>에 10점을 찍었다. 영화 자체도 그냥 다 너무 좋았다. 

영화 오래된정원 포스터

<26년>, <태극기 휘날리며>, <귀향>, <눈길>, <동주> 등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들이 많이 나왔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사적 사건에 입각하여 만들 때에 감독은 물론이요 모든 배우와 스텝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건 물론이다. 하지만 그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다. 역사적 가치관, 사건의 해석 역시 본인의 자유일 것이다. 물론 이것에 악평을 하는 것 또한 관객의 자유이다. 미국은 미국을 까는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미국 관객은 거기에 침을 뱉을 자유가 있다.  

영화들에게 ‘잘했다, 잘못했다’고 잘잘 못을 따질 이유가 없다는 거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는 오락이다. 아니, 영화가 오락이라고 쓰는 데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드는 느낌일까? 오락 맞잖아. 공부하라고 만든 거 아니잖아? 제발 영화나 드라마로 역사 공부를 하지 말자는 거다. 그걸 보고 나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도 말자.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웰메이드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있을 수 있지만, 잘한 영화도 없고 잘못한 영화도 없다. 

작년 8월 이맘 때 상해를 갔었다. 상해에서 제일 번화가인 신천지에 있다가 중국 친구들을 졸라 상해임시정부에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 날은 15일이었다. 

아무리 그 곳이 외곽에 있다고 한들, 광복절이니 엄청 붐빌 게 뻔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빨리 좀 서두르자고 했다. 아니 근데 웬걸? 서울로 치면 청담동인 신천지 그 한복판에서 불과 6분 거리에 임시 정부가 있는 게 아닌가? 한국인들이 임시 정부를 너무도 찾지 않아서 중국 정부가 철거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엄청 외곽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상해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 중, 임시 정부를 가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었던 거다. 아마 코앞에 두고도 그냥 지나쳤을 거다. 아무튼 그렇게 미안하리만치 너무 쉽게 찾은 그 곳엔, 예상보다 적은 한국인들이 있었다. 줄을 서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래도 인천에서 우릴 실어온 비행기에 탄 한국 사람들보다도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 작고 소박한 임시 정부 건물을 꽉꽉 매워 싸지도 못했다니. 

 

“한국은 오늘 공휴일이고, 이렇게 가깝다니! 사람 엄청 많겠지?”

“그러게. 줄 엄청 서야겠는데? 너 이 더운 날씨에 고생 좀 하겠다!”

고생은요 무슨. 애국심 강한 중국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이 좀 상했었다. 

 

도서관에 가면 다양한 시각으로 쓰인 ‘미국사’에 대한 책들이 많다. 우리는 역사 역시 다각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디에 매여 있던 나의 뒤통수를 후려칠 수도 있고, 어쩌면 나의 역사관이 확고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광해군’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 말이다. 당시엔 명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일본(왜)과도 교류하여 지탄을 받았던 광해군이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의 중립 외교 정책이 지혜로웠다는 평가도 받고 있지 않나. 

앞으로도 우리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무진장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왜곡은 하지 말아야겠지만, 다양한 색을 가진 감독들이 연출이 있었으면 한다는 거다. 오히려 역사적인 영화가 꽤 많이 나오면, 지금처럼 마녀사냥을 당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사명감이 투철한 영화, 또는 그런 시대상을 다룬 서정적인 영화, 피 튀기는 영화, 장르 영화, 친일파를 다루는 영화, 그 시대의 가수 이야기, 택시 운전사 이야기, 학생 이야기, 엄마 이야기, 누나 이야기. 영화는 영화고, 우린 극장 밖에서 더 많은 역사 공부를 하고 있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극장 밖에서 침 튀기게 싸우면 된다.

영화 동주 스틸컷

5월에 할머니 49제가 있어서 서울 어느 절을 찾았었다. 스님과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분은 영화 <26년>에서의 ‘그분’이고, 영화 <택시 운전사>가 사실이 아닌 ‘날조’라 하신 분이다.

음, 그분의 종교가 불교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인자하신 스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데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더라. 어느 절을 다니시는지 모르겠지만 시주를 상당히 후하게 하신다고 한다. 아, 그러고 보니 내게서 그분 이름을 꺼낸 스님이 이 분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분은 부처님께 무엇을 비는 걸까? 극락왕생? 난 불교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참선’이라는 것이 본인을 꿰뚫어 아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는 정녕 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실까. 자기가 한 일들에 대해서. 그래, 어쩌면 <택시 운전사>나 <화려한 휴가> 모두 날조일지도 모르지. 현실은 더욱 악랄하고 잔혹했으니. 하긴 근데 그걸 어찌 스크린에 담는 담? 

그러니 우리가 알아야한다. 스크린 밖에서, 브라운관 밖에서, 휴대폰에서 빠져나와 아는 것에 힘써야 한다. 의심하고 꼬아보고 되짚어보아야 한다. 영화는 잘 못 없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믿는 우리는 잘 못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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