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철학으로 대체하지마라. 로미오가 한 말을 기억하라.
‘철학이 줄리엣을 만들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지워버려라.’/ 셰익스피어

[공감신문] 기원전부터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노래할 사랑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것, 아니 이미 사랑의 경험이 있음에도 또 다시 사랑이 어려운 건 왜 일까. 그건 사랑의 방식과 사랑이 피워내는 향기들이 무궁무진 다양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고 사막의 날씨처럼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심지어 우리는 나 자신의 마음도 알지 못할 때도 많다.

얼마 전 나는 <인 더 하우스>(In the House, 2012)라는 영화를 봤다. 혹시 볼 생각이 있는 독자 분들을 위하여 스포일러 없이 조금만 이야기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어느 고등학교에 문학 선생으로 전근을 가게 된 제르망은 학생 클로드를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쉽게 설명하자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다. 살리에르 같은 제르망은 클로드의 문학적 재능에 놀라게 되고, 이 다듬어지지 않은 천재를 도우려다 결국은 농락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왜? 클로드의 글이 읽고 싶어 미치겠거든. 이것은 아마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모두 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제르망은 자기 부인을 사랑하고 클로드 역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과의 스토리가 미친 듯이 궁금해서다. 

(영화 = 인더 하우스)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 왜 ‘코미디’일까? 난 드라마나 서스펜스 장르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농락하는 것과 비슷한 ‘희롱한다’의 ‘희’가 주는 의미가 ‘코미디’와 가깝다할 수도 있겠다. 

영화를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데, 유독 이 영화가 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던 건 사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한 편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마 <인더하우스>를 관람한 분들이라면 내 의견에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난 이 영화를 보며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1999)가 떠올랐다.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이 영화의 공식적(?) 장르는 ‘드라마’이며, 한 쪽에서는 이 영화를 퀴어, 즉 동성애 코드 영화라고도 한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 :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뜻하는 용어. (출처: 두산백과)

 

그렇다. 눈치 채신 독자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난 살리에르 같은 선생 제르망과 모차르트같은 천재 클로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런 코드를 느꼈다. 물론 영화 <리플리>처럼 짝사랑이다. 클로드를 향한 제르망의 사랑. 그러나 제르망은 아마도 자신이 클로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부분을 비춘 적이 없었고 아마도 나 같은 관객 빼곤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리플리>에서 남을 따라하는 재능 외에 가진 게 없는 톰은, 모든 걸 가진 디키를 사랑한다. 디키는 엄청난 부자에, 잘생겼으며, 여자도 많고, 인생을 즐길 줄도 안다. 그런 디키를 보며 톰이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다. 둘은 인생의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톰이 아무리 디키처럼 꾸며 입어도, 그처럼 쳇 베이커의 음악을 듣는다고 해도 절대 디키가 될 수 없다. 디키의 그런 자유로움은, 마르지 않는 지갑과 그것을 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보헤미안적 열망, 그럼에도 가끔씩 튀어나오는 부르주아적인 거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톰은? 돈을 준다면 어딘가에 구속되어야 하며,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떠돌아야했기에 안정적이고 싶다고 느끼며, 가끔씩 아니 자주, 하인(下人)적인 태도가 튀어나온다. 그는 절대 쿨할 수 없는 남자다. 

디키는 톰이 상처받을 만한 말들도 서슴없이 해댄다. ‘넌 돈도 없잖아.’ ‘그 돈 우리 아빠가 준 거 아니야?’ ‘허구헌 날 기집애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난 네가 지긋지긋해!’라면서.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그럼 디키를 떠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럴 수 없지. 디키는 톰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다. 디키를 알기 전 톰은 자기 인생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디키가 보여준 세계들은 정말 색달랐다. 톰은 놀라며, 반하고, 황홀해하다가, 소외되어지고, 배신감이 들다가,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고, 외면하려다가, 그 상처를 부여잡고 그의 곁에 머문다. 왜?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디키의 존재가, 그 인생이, 너무도 황홀해서 부여잡는다. 무엇을 보는 것 같나? 마치 ‘나쁜 남자(혹은 여자)’곁에 머무는 애처로운 애인의 모습들과 너무도 닮아있다.

(영화 = 리플리)

그래서 나는 선생 제르망이 천재 학생 클로드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제르망은 클로드의 부탁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형식도 없는 그의 글에, ‘숙제의 형식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면 그만이었을텐데.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나. 클로드의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걸! 정작 본인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인식조차 못하는 것들을 보존시키고 싶을 수밖에. 그리고 그 글을 써내려가는 창조주의 손을 거들 수밖에. 

‘그렇게 잘 쓰면 왜 선생님은 작가가 되지 못했어요?’
이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를 내칠 수 없는 제르망은, 비참하다. 

‘그렇게 힘들면 헤어지면 되잖아.’
이런 말을 듣는 여자(혹은 남자)는, 그런 생각은 굴뚝같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러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라는 마음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은 한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도 몰랐던 나 자신을 알아가게 한다. 그것은 겨우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아닌, 내가 속한 ‘세상’을 알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흔히들 말하는 ‘좋은 사랑’은 이를 통해 변해가는 나의 모습과 그 세계가 마음에 드는 것이고, 그 반대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좋은 것만 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변태들은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을 꽤 자주 즐긴다.

사랑보다 무섭다는 애증에서 증오의 감정은, 그러니까 톰이 디키에게 느낀 증오, 제르망이 클로드에게 느낀 증오,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게 느낀 증오, 바람피우다가 걸린 애인을 용서한다며 계속 만나는 한 남자의 증오, 그런 모든 증오는 사실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이 아닐지 모른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한 증오일지도. 이런 관계가 끝이 나더라도 절대 깨달을 수 없는 게 있다. 디키는, 클로드는, 모차르트는, 바람을 피웠던 애인은, 상대방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나에게 무지 잘해 준 사람이란 기억 밖에.

(영화 = 아마데우스)

한국어에는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무궁무진하게 많지만, 그래도 가끔은 뭔가 내 마음에 딱 들어맞는 게 없어서 은유를 하게 되고 문장을 늘어뜨리기도 한다. 내 어휘력이 부족하기도 할 테고, 혹은 그 감정이 너무도 새로운 것이라. 어제와 또 다른 내가 다시 하는 사랑은 또 너무도 낯선 것이라. 

저번 주에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라는 소설 제목을 인용한 칼럼을 썼는데, 오늘도 쓰다 보니 거기에 결론이 닿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제르망, 톰, 살리에르, 그리고 이전의 나를 보듬으며 마무리를 짓고 싶다. 우리의 사랑은, 자격이 없던 게 아니었다. 우리의 사랑은, 창피한 게 아니었다. 우리의 사랑은, 그 나름대로 빛났던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쓸데없는 열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던 건, 적어도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랑이라고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니 사랑을 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에 빠지기를 겁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을 온전히 내려놓고 무릎 꿇리는 사람을 만나는 건, 어쩌면 아예 불행은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 감정들을 과연 일생에 몇 번이나 느낄 수 있을까? 음, 이 축복 아닌 축복은 정말 인생에 몇 번 없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 한 톨이라도 남아있을 테니까. 사랑에 대한 분별력은 어쩌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건 아닐까. 

글을 쓰다 보니 씁쓸해져서 쓴 술이 당기는 저녁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