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던져주시고 
들에다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 가을날, 릴케(1875-1926)
 

[공감신문]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릴케의 가을날의 시중에 가슴에 가장 와 닿는 문구이다. 아마도 지난겨울, 봄, 여름 동안 치열하게 땀 흘리며 일하지 않은 이는 풍성한 수확을 할 수가 없다. 사랑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이도 이 가을에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은 그대, 사랑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그대, 이 가을, 모두 유죄인 것이다. 

물론 치열하게 살아낸 그대에게는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This was very big summer)'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아내지 않았다면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가을 반성과 참회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다. 게다가 결핍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더 쓸쓸하고 더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하고 빈 손바닥만 쳐다보며 쓸쓸해지는 마음, 그리하여 이곳저곳을 서성이는 비루한 유랑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여,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여름의 불볕더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 가을에는 달콤한 과일을 먹을 수 있다. 불꽃같은 여름 볕을 견뎠기 때문이다.

날마다 비만 오고 구름만 가득했다면 포도, 무화과, 사과는 맛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내일을 위해 홀로 깨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써야 한다. 더 치열하게 더 철저하게 가을앓이를 하며 스스로를 깨우쳐야 한다. 더 아래로 내려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순수한 나와 대면해야 한다. 나와 마주 보며 고독를 자유롭게 만끽해야 한다. 반드시 민낯의 나와 대면해야 한다.

어쩌면 고독은 행복한 침묵의 시간이기도 하다. 고독의 시인 릴케는 “고독은 비와도 같다”라고 했다. 신달자 시인은 "견디고 싶을 때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생의 필요조건이라 한다면 감정과 사유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릴케가 쓴 '로댕'의 첫 구절에 이런 말이 있다. "명성을 얻기 전 로댕은 고독했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명성은 아마도 그를 더 고독하게 했을 것이다. 명성이란 결국 하나의 새로운 이름 주위로 몰려드는 모든 오해들의 총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수십 번 되새김질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은 '인간은 고독 속에 있을 때 가장 위대하고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서 그 예로 베토벤을 꼽았다. 고독과 고난 속에 놓였던 베토벤의 삶이 오히려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살게 하는 힘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이나 인간이나 열망이 사라진 자리는 맑고 고요하다. 곧 비우고 떨구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것이 쇠락하여 겸손해진다. 모든 것은 어디론가 뿔뿔이 떠나고, 고독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면 기억들은 저 먼 망각의 숲으로 불려 가고, 그리운 것들은 낯선 숲으로 흩어질 것이다.

누구는 텅 빈 가슴을 허공에 내걸고 사정없이 부유하고플 것이다. 또 누구는 수채화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가없는 독백을 토해낼 것이다.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한 매미들이 안간힘을 써서 가냘프게 울어대지만 그 애절함도 곧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묻혀 돌아가리라. 들판은 순금을 뿌려놓은 듯 노랗다. 

넉넉하다. 가끔씩 찰랑거리는 맑은 바람이 길을 내듯 흩뿌려 놓는다. 가을 속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겸허해지고 숙연해진다. 그리운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고 오래전 죽어간 이를 떠올리며 추억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은 이 가을. 누구는 기쁨으로, 누구는 슬픔으로 갈무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껴안아야 한다. 봄을 위해 다 털어내고 혹독한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는 나무를 보라. 미련 없이 추락하는 나뭇잎들을 보라.

지금, 여기, 잠 못 이루고 홀로 깨어있는 그대, 실연했는가! 지독한 경제적인 압박을 받고 있는가!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는가! 그럼에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견뎌 이겨내라! 고통이 죽음의 문턱까지 밀더라도 빠져나와라! 살아 나와라! 자발적이든, 타의 적이든, 내려놓기에는 가을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포기하기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그중에 단 하나 만이라도 그대를 위한 선택을 찾자.

이 가을 미지의 아름다움을 위해 치열하게 앓자. 홀로 깨어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며 집을 지을 준비를 하자. 멋진 그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