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유지하는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암수의 성행위를 좀 더 복잡하고 더욱 보람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섹스를 더욱 섹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데즈먼드 모리스 저<털 없는 원숭이> 중에서)
 

[공감신문]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본 따 만드셨다는 남자사람 아담, 그리고 그가 외로워하였기에 만들어졌다는 여자사람 이브. 둘은 에덴동산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노동과 잉태의 벌을 받으며 쫓겨났다고 성경은 말한다.

어린 시절, ‘아기는 어떻게 생겨?’란 질문에(본능적으로 왠지 저건 아닐 것 같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듣고 여전히 뭔가 찝찝하고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을 때쯤이었다.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주일 성경공부 시간에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듣게 되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으시고-’라는 구절이 나오는 사도신경을 유치원 때 다 외웠다. 그리고 ‘동정녀’가 무슨 뜻인지, 또 아이는 어떻게 생기는 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Virgin of Victory(1496)> 중 일부 / Andrea Mantegna

그래서 우리는 원래부터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할 만큼 이쁘고 잘생기고 똑똑한 줄 알았었다. 이후 학교에서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라고 배웠다. 진화된 사람으로, 이전의 호모(homo)- 조상들의 추상화를 보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더 자라서, 우리가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단 이야길 듣기 전까진.

종교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이다. 우리나라가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 가르치는 건, 거기에 토론 과정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진화생물학은 이과 쪽으로 보이지만 거기에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 인문학에 훨씬 가까워진다.

보편적인 주입식 교육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선택했던 나 역시 생물학엔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은 가장 재미있게 읽는 책 카테고리에 동물학이나 진화생물학이 빠지지 않는다. 나의 학문적 열등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철학이 사상가들의 말장난이라면, 이건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을 제시한다. 마치 추리소설처럼. 

찰스 다윈 1809-1882

서두가 길었는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주제는 ‘반反사회적 성격’에 대한 이야기이자 ‘반反사회적 범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구체적으로는 성범죄, 더욱 구체적으로는 아마 소아를 상대로 한 성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거다. 혹여 이런 주제가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까봐 미리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읽으시는 분들은 중간에 끊지 마시고 끝까지 보셔야 이 예민한 주제에 대한 서로의 오해가 없을 거라, 덧붙이고 싶다. 그럼 시작하겠다. 

몇 년 전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어느 동영상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건 ‘토끼의 짝짓기’라는 제목이었다. 수컷 토끼가 암컷 토끼 등에 올라타려는 것 같았다. 내가 그의 움직임을 알아채는 순간! 번갯불에 콩 구워- 아니, 이런 표현도 과분할 만큼의 시간만큼 무언가?를 하더니 쿵(...) 하고 쓰러지는 게 아닌가? 

난 그 무언가가, 무엇인 줄 알고 있었지만 정말 한 게 맞나 싶었다. 흔히 남녀 간 섹스를 할 때 사정이 너무 빠른 남자를 속된 말로 ‘토끼’라 칭한다. 그런데 정말 토끼가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아마 이전에 만났던 남자에 대하여 ‘걔 토끼야’라고 말했던 모든 여자들은 이 동영상을 보면 그 남자에게 굉장히 미안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찰나’의 시간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암컷 토끼의 반응이었다. 너무 짧아서 암컷 토끼의 표정을 살필 새도 없었지만, 성교 이후 암컷의 표정은 너무도 태연했다. 암컷도 못 느낀 걸까? 대꾸할 가치도 없는 건가? 나는 동물을 거의 키워보지 않았기에 더욱 몰랐던 것이다. ‘오르가즘(orgasm)’을 느낄 수 있는 암컷인 인간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라는 사실을! 

인간과 상당히 비슷한 유전자 구조를 가져서 자주 비교가 되곤 하는 침팬지 암컷들은 우리에 비하면 거의 ‘못 느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영장류 역시 마찬가지다. 그 오르가즘 같은(더 나은 표현을 모르겠다) 오르가즘의 기분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 인간은 스스로에게 이 커다란 축복을 선사하였다. 우린 살기 위하여, 그렇게 진화했다. 

Kitagawa Utamaro의 <shunga>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겐 따로 ‘발정기’가 없다. 어찌 보면 평생, 발정기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식’을 위해서만 섹스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섹스가 생식으로서만 필요한 순간은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린 거의 평생에 걸쳐 섹스를 한다. 왜? 즐겁기 때문이다. 유희적이다. 암과 수, 둘 다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어서 그러하다. 반대로 다른 영장류는 비교적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가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게 진화한 건 그래야 안전하고 경제적일 수 있어서였다고 진화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예전부터 잡식성이었지만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신체조건이 꽤나 불리했다. 

곰만 상상해 봐도 그렇다. 그렇게 덩치가 크면서도 시속 60km를 달릴 수 있는데, 훨씬 민첩해 보이는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그 뿐인가? 곰이 앞발로 툭! 친다고 생각해보자. 벌써부터 내 눈알이 땅바닥을 굴러다니며 헤어진 두개골을 찾아 헤매는 것 같다. 

단, 인간은 사회적이며 똑똑했다. 그리고 다양하게 먹어야했다. 우선 인간들은 서로 암컷을 차지하려는 싸움을 멈추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수컷의 개체 수가 줄어들면 우리 인간들만 불리해지니까. 그래서 하나의 암과 수, 쌍을 이루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후에 우리는 부족 간, 나라 간에, 또는 연합으로 싸우기도 해왔지만. (동물적인 본능이 아예 가시지는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한 쌍, 한 팀이 된 둘은 새끼를 더 잘 키울 수 있었다. 수컷은 더욱 열심히 사냥했고, 암컷 역시 새끼를 더욱 잘 돌보게 되었다. 이들은 새끼가 다 자라서 집을 떠날 때까지 팀을 이루는 게 유리했다. 그래서 이들은 섹스라는 유희를 ‘즐기게’ 되었다.

오르가즘은 둘을 유대감으로 단단히 묶어둘 수 있었다. 또한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었던 인간 여자는 더욱 열심히 섹스에 응하고는, 이후 지쳐 누워있곤 했다. 아마 직립 보행하는 인간 여자가 섹스 후 암컷 토끼처럼 태연하게 돌아다녔더라면, 임신이 더욱 불리했을지 모른다고 어느 학자들은 주장했다. 그러니 여러모로 오르가즘은 인간진화에 유리했던 것이다. 

인간이 치고 박는, 혹은 그런 폭력적 장면을 보는 행위 역시 섹스처럼 유희적인 모습이 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이런 걸 재미삼아 하지 않는다. 진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가 불리했던 인간들은 이걸 놀이로 삼으며 그 야성을 해소해왔다. 뇌가 발달한 똑똑한 인간들은 이런 놀이들을 더욱 다양하고 복잡하게 발달시켜왔다.

영화 <파이트 클럽> 중에서

이런 과정 중, 우리는 문명사회에 들어와서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유희적’인 측면을 허용해주다보니, 때때로 타인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가학적인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기 이른 것이다. 

다양한 성 취향을 넘어, 그 취향을 상대방에게 강요, 아니 강압적으로 행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도저히, 아무리 차분하게 생각하려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얼마 전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아동 성 범죄자를 대상으로 검사한 결과, 그들 모두가 ‘소아 성애’ 취향을 가진 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들의 성 취향보다 더욱 밀접한 것은, ‘반反 사회적인 성격’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그 이전에 다른 성격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 전과자들이었다.

모든 소아 성애증 환자들이 소아 성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다. 본인이 그런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정신과를 찾아 이를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꽤 있다. 그건 그들이 스스로 얻은 취향이 아니다. 대부분의 소아 성애증은 어린 시절 환경에 의하여 생겨난다고 알려져 있다.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소아 성애증을 유발시킬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소아 성애증 이외에 다른 성 도착증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중요한 건, 스스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은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는 이 고통이, 타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크나큰 사건이 되기 전에 예방해야 한다. 음주는 죄가 아니지만, 음주운전은 범죄인 것처럼. 

성도착증 환자보다 주목해야할 것은 반反사회적 성격의 범죄자들이다. 그들은 ‘성’에 대한 욕구보다는 ‘사회’에 대한 악의적인 감정으로 이런 범죄를 저지른다. 자신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알아도,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지 않는다. 악의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섹스 취향이 다양성을 인정받게 된 건 우리가 서로 안전하게 협력하며 공존하기 위해서였다. 

반反사회적, 아니 반反인간적인 취향은 절대 인간 사회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는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암수의 성행위를 좀 더 복잡하고 더욱 보람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섹스를 더욱 섹시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데즈먼드 모리스 저<털 없는 원숭이> 중에서)
 

그렇다면 이런 범죄 피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했다. ‘모든’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반反사회적 범죄자들은 자살대신 범죄를 택한 것일지도.  

에밀 뒤르켐 1858-1917

결국은 건강한 사회가 중요한데, 특히 돌보아야할 대상은 아이들이 아닐까. 우리는 성범죄를 비롯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걸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제 2, 제 3의 누군가가 생겨나기 전에 예방하려는 노력은 있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 기대치 못했던 칭찬, 이유 없이 주는 미소.

평균적으로 사람의 뇌는 23세가 다 되어야 그 성장이 완전히 끝난다고 한다. 우리는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에 발을 내딛은 아이들에게, 사춘기의 10대들에게, 이제 막 수능을 치룬 열아홉에게, 막막한 20대 초반에게 어떤 눈빛, 어떤 말투로 말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쓰는 단어들은 얼마나 비문학적일까. 그것을 받아들이는 체감 온도는 어떠할까. 그것은 여기까지 인간을 진화시킨 ‘안전’과는 상반되는 위협적인, 오르가즘과는 거리가 먼 악의적인 기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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