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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뉴욕에서 고양이 꼬리를 당기면 LA에서 야옹하겠지

‘별, 인간, 식물, 먼지...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피리 부는 사람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출 뿐이다.’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 1955

[공감신문] 오... 우선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어리광을 좀 부리자면, 걱정이 앞선다는 것이다. 사실에 입각하여 내가 믿는 ‘진실’을 피력하는 칼럼의 특성상, 정말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하려는데- 이건 도무지 너무도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라 아무리 냉정하게 쓰려고 해도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는 거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믿을 만’(사실 가장 허무맹랑한)하다는 종교들의 이야기와도 거리가 멀고 심지어 ‘사이비’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종교의 반대말은 사이비가 아닌, 과학이라 믿는다. 그리고 이건 정말 과학적이다. 내가 혼자 골방에서 글을 쓰다 어느 이상한 집단에 빠져, 글로 독자 여러분을 꾀려 한다는 생각은 마시길. 그렇게 한 분의 신을 섬기기에 난 세상에 호기심이 너무 많고, 골방에 박혀있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아마, 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계몽적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여느 때와 같이 추웠던 어느 오후에 시작된다.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적막을 깨고 복도에서부터 한 남자의 거친 욕지거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는가? 

순간 나는 책을 방패처럼 들어올리곤 얼어버렸다. 낮 시간이 주는 안전함 같은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우리 집 현관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우리 층엔 우리 집 밖에 없고, 아마도 나에게 하는 욕 같았다.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몇 초간 고민을 하다가, 살금살금 걸어 인터폰을 통해 현관 밖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쥐새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쯤 나가보니, 택배 하나가 와 있었다. 내가 얼마 전 주문한 10kg짜리 케틀벨이었다. (...) 그제야 두려움이 가시고, 난 정말 욕을 먹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후에도 왜 그의 욕은 날 오랫동안 짓눌렀을까? 그의 욕은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참을 수 없이 무거운 그의 삶의 무게가 있었다. ‘X’ 같은 건 나, 혹은 케틀벨이 아닌, 그가 이 무게를 감당해야할 이유에 있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이 10kg짜리 케틀벨을 하루에 적어도 20번은 들어올린다. 나는 그 욕쟁이보다 힘이 약한 데도 잘 해낸다. 왜?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상대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질량, 무게를 가진다. ‘툭!’ 뉴턴은 사과를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나는 인력이 몹시 로맨틱하다고 생각한다. 파도 역시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기는 것 아니던가.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사랑하는 것 같다. 달이 보이지 않는 낮에도 파도는 부지런하며, 그 때에도 여전히 달은 거기 있다.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달이 차오른 날, 사람들은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나 보다. 저도 모르게 출렁이는 깊게 차오른 해수(海水)보다 훨씬 미약한 인간들이니 더욱 그럴 수밖에. 보름달이 뜨는 날 교통사고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고, 타이타닉호 침몰 당시 보름달이 떴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 잭과 로즈도 그렇게 급하게 사랑에 빠졌던걸까.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며 인력과 중력에 대해 찾아보다가 흥미로운 2년 전(...) 뉴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중력을 가진 모든 물체가 ‘인력’을 가진다는 것은 예전에 증명이 되었는데... 그럼 왜, 끌어당기는 건데? 무거운 존재가 끌어당기는 힘이 크기 때문에, 지구는 태양 주변을 돌고 달은 지구를 돈다. 근데 왜? 

그건 우리의 시공간이 휘어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구 나이 약 46억년 만에- 그리고 이 학설을 주장했던 어느 예술가의 주장 100년 만에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 존재들이 갖는 무게의 성격을 ‘왕관’, 혹은 ‘십자가’라 말하고 싶다. 왕관은 능동적이며 자발적인 성격이다. 그 무게를 견디기에 충분하므로, 가장 잘 보이는 머리 위에 올린다. 아마 전능한 신께서도 그 빛나는 정수리를 굽어보기 쉬우실 거다. 

반면 ‘십자가’는 수동적이다. 의무나 빚, 책임, 죗값 같은 거다. 교회에선 우리에게 모두 ‘죄’가 있으며, 예수님이 대신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다고 한다. <시지프의 신화> 속 시지프가 신에게 받은 형벌은 매일 엄청 큰 돌덩이를 산 정상에 올리는 거였다. 정상에서 돌은 굴러 떨어지고, 그는 매일 다시 이것을 정상으로 운반한다. 알베르 까뮈는 인간의 삶이 이런 모순 덩어리랬다. 

사랑에는 왕관과 십자가, 두 개 다 있다. 사랑에 빠진 이들은 자발적으로 무게와 책임을 떠안으려한다. 개바람둥이였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저)> 속 토마스는, 한 여인에게 ‘무거움’을 느끼며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가 마치 바구니에 담겨 강으로 떠내려 온 아기 같다고 느꼈다. 동정심과 연민이다. 이로써 그에게 그녀의 존재는 무거워졌다. 질량이 늘어나니, 인력도 커진다. 끌린다. 사랑한다. 

시지프가 형벌을 받은 이유는 죽음의 신을 가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삶’을 사랑했으므로. 예수가 십자가를 진 이유는 우리 죄를 대신 하기 위해서다. 그는 우릴 사랑했으므로. 사랑은 그런 것이다. 

오, 그러나 때론 너무 무거운 누군가의 사랑을 견디기 힘들다. 그럼 끌려야 되는 거 아니냐고? 예수가 저렇게 십자가를 짊어졌다고 모두가 예수를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내 맘 속에서의 존재감이다. 

책임감, 영어로 responsibility. response+ability, 응답+능력. 여자가 불러오는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받쳐 들며, ‘오빠 나 책임져’라고 했을 때, 그녀는 그가 응답할 능력- 곧 책임이 있다고 느끼기에 그 말을 꺼낸 것이다. 그 무거움이란! 

100년 전 시공간이 휘어져있기 때문에 무거운 것에 끌린다는 이야기를 한 예술가가 있다고 위에서 말했었다. 그는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다. 난 이전부터 그가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사진으로 본 그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우리 아빠가 말하는 긍정적인 의미의 ‘쟤 또라이야’같은 타입의 눈빛. 그리고 그가 ‘빛’을 연구할 때, 빛의 입장이 어떠할까, 이입해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 정말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자답지 않은 비유를 하는 사람이었다. 예쁜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1시간은 1초같이 가고, 뜨거운 물체 위에서 견디는 1초는 1시간 같다며 그게 ‘상대성 이론’이라고 말한 장본인이다. x, y, z 같은 무책임한 글자대신 ‘여자(girl)’라는 단어를 쓰는 시인이었다.

미국의 댄번(Dan Burnes) 교수

그가 주장한 것을 현대에 어느 과학자의 간단한 실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위의 사진에서, 파란 천을 시공간이라 치자. 무거운 물체를 올려놓는다. 그 후에 비교적 가벼운 물체들을 떨어뜨린다. 이것은 시공간을 돌다가 그 무거운 물체 쪽으로 쏠린다. 이거다! 그래서 질량이 무거울수록, 끌린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보시다시피 천은 휘어져있다. 

최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게 된 건, 어느 커다란 두 블랙홀의 만남 때문이었다. 하나의 크기는 태양의 36배, 또 하나는 29배란다. 지구로부터 13억 광년(...)떨어진 두 블랙홀이 만나 하나가 되는 이 스캔들은 큰 파동을 일으켰는데, 그 파동(중력파)이 지구까지 닿아 그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뿅’하는 아주 미세한 물방울 소리다.)

뉴턴의 주장과는 좀 다른 이런 이야기를 하며,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비유했다.
 

‘전신은 일종의 아주 긴 고양이다. 내가 뉴욕에서 고양이 꼬리를 당기면 LA에서 야옹하겠지. 이해돼? 라디오의 방식도 같다. 내가 여기서 신호를 보내면 다른 사람이 저곳에서 그걸 받는다. 다른 점이라면 고양이가 없다는 것뿐.’

당시 누가 이런 몽상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제야 비로소 뭔 말인지 알 것 같다. 그는 별, 사람, 먼지, 모든 것들은 그저 저 멀리 어느 피리 부는 사람의 곡조에 맞춰 춤을 출 뿐이랬다. 오, 피리소리를 이제야 조금 듣게 된 거다!

그래서 나보다 존재감이 무거운 달의 인력에 맞춰- 난 농후한 눈빛으로 사랑에 춤출 수 있었을 것이고, 가족의 기대나 사회적 책임감 같은 무게감에 의해 움직이고 있던 것 아니겠나. 

여기서 감히, 종교처럼 삶의 어떠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난 분명 그날 아침에 10kg짜리 케틀벨이 오늘 도착한다는 카톡을 받았었다. 그러나 ‘옷’이나 ‘치킨’처럼 나를 들뜨게 하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그 신호를 가벼이 여겼을 뿐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지금도 그 연주를 쉬지 않고 있는데 말야.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내 마음이라는 우주 공간에서는 맘대로 그 무게를 매길 수 있다는 거다. 누가 한 말인데,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단다. 아마 케틀벨을 배달해 준 택배기사님에겐 그 노동이, 그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마음속 어떤 아름다운 것에게,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을 선사해주자. 미친 존재감을 불어넣어주어서 모든 가벼운 것들이 그리로 쏠리게 하자는 거다. 아예 허무맹랑하지 않다면 꿈이라도 괜찮다. 아인슈타인 역시, ‘나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이용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예술가’라고 말했다. 지식보다 중요한 이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인 것 같다.

난 이 대단한 몽상가가 이렇게 한 방 크게 먹인 것에 대하여 굉장한 쾌감을 느낀다. 마구마구 상상하는 것을 더욱 용납 받은 기분이랄까!

예전에 되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은 존재였고, 자주 연락할 순 없었지만 맘속으로 항상 그를 응원했었다. 그에게 드문드문 오는 메시지에서 농축된 그의 진심 역시 느꼈었다. 친구들은 ‘의미부여 하지 마, 찌질아’라고 했지만, 난 그렇게 쉽게 속을 만큼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기에 믿을 수 있었다. 

이윽고-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신호를 들었을 때!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고 판결이 났다. 거봐, 그건 고양이의 야옹이 맞았다니까!

내 마음 속 우주에 닿을 라야 닿을 수 없는 멋진 것들에 무게를 둘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옹, 야옹,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지. 오늘도 피리 부는 사나이의 곡조에 맞춰 이 삶에 흥겹게 춤을 출 것이다. ‘나’라는 약 50kg 질량의 인간이 지구를 방방 뛰며 춤을 추면, 거기에도 미세한 파동이 일겠지? 그 즐거운 파동이 이렇게 ‘글’로서 당신의 눈에 닿은 건 아닐는지. 그리고 최후에 가슴까지 닿는다면- 난 더 기쁠 것이다,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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