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왜성도 축조…울산 전투서 물의 중요성 깨닫고 우물 120곳 파기도

 

[공감신문 김대호 기자]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1592∼1598)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침공한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일본으로 퇴각한후 자신의 영지에 세운 성이다. 그는 조선을 침략해 선조의 아들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기도 했다. 1601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1607년에 완성했다.

▲ 구마모토성에 전시된 카토 기요마사 초상화

정유재란 당시에 경상도 지방으로 퇴각한 왜군은 울산왜성 전투에서 가토 휘하의 일본군은 명군과 조선의 연합군에 포위돼 13일간 버티면서 물이 모자라 오줌은 물론 시체에 고여있는 물까지 먹었다고 한다. 그때 가토는 물의 중요성을 깨달아 구마모토성을 쌓을 때 120여곳에 우물을 팠다고 한다. 울산왜성도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했다고 한다.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는 한반도 출신 장인의 기술이 활용된 것으로도 알려졌다.

 

1877년 발생한 내전인 세이난(西南)전쟁 때 사쓰마번(薩摩藩, 규슈 남부지역)의 영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끄는 군대 약 1만3,000명이 52일간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시 성안에서는 3,500명이 방어에 나섰으며 이를 계기로 구마모토 성은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으로서 주목받았다.

가토 기요마사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가토 신사의 명예 궁사(宮司· 신사의 우두머리 신관)인 유타 시게히로(湯田榮弘) 씨는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당시 재인 조선인이 빼어난 기술을 제공했다고 앞서 밝힌 바 있다.

분류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구마모토성은 나고야(名古屋)성, 오사카(大阪)성 또는 히메지(姬路)성과 함께 일본 3대 성으로 꼽히기도 한다.

구마모토성의 주변을 둘러싼 돌담은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이 성의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인 천수각(天守閣)은 세이난전쟁 직전의 화재로 소실됐으며 1960년에 복원됐다. 일본 당국은 1998년부터 축성 400주년인 2017년까지 구마모토성을 본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는 작업을 추진해 왔다.

▲ 14일 발생한 강진의 영향으로 구마모토성 천수각 지붕의 기와가 훼손돼 있다. /연합뉴스

지난 14일 밤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 규모 6.5의 강진이 강타해 9명이 사망하고 950여명이 부상한 것으로 15일 잠정 집계됐다.

이번 강진으로 400년을 굳건하게 버티던 구마모토성(城)의 토대가 무너졌다. 특히 구마모토성은 돌담 약 100m가 허물어지고 천수각 지붕의 기와 등이 파손됐다.

▲ 지진으로 돌담이 심하게 훼손된 구마모토성의 모습. /연합뉴스
▲ 구마모토 성의 건물을 떠받치는 돌담이 지진 때문에 허물어져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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