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장이로 차린 여자들의 목도리가 나비같이 보드랍게 나부낀다. 그 오동보동한 비단 다리를 바라다 보노라니 P는 전에 먹던 치킨 카츠가 생각이 났다.’ (채만식,<레디메이드 인생>(1934) 중에서)

 

[공감신문] 1956년 어느 봄날, 종로 어느 건물 앞은 경성에서 제일가는 멋장이인냥 빼입은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다. 한국배우전문학교의 개업식. ‘비비안 리’가 나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수십 번 보며 영화배우의 꿈을 키운 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몇 년 전 ‘6.25’가 이곳을 쓸고 갔었다는 걸 자꾸만 까먹게 된다. 

명동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무용가 최승희, 1940

이들에게 영화와 맥주는 빼놓을 수 없는 일상. ‘마꼬’대신 ‘해태’를 피울지언정, 낭만은 포기할 수 없다. 어차피 시골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실테지. 그의 여동생은 고등학교도 포기했다지만- 중학교만 나와도 ‘주부 자격증’은 따놓은 셈인데, 뭐!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대사도 외우다보니 ‘저 정도 연기는 나도 하겠다’고 마음먹은 젊은이가 어디 ‘그’뿐이겠는가. 피를 팔아 영화에 나오는 배우 같은 옷을 장만해입는다. ‘그래도 우골탑 들어갈 때보단 입학금이 가볍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배우가 되었냐고? 나야 모르지. 나는 허구를 쓰고 있는 것이니까, 허허허! 다만- 저 당시 수많은 경성 젊은이들이 그러하였으며, 후에 이 학원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인 신성일과 최지희 등을 배출했다. 

MBC '그때를 아십니까(1986)' 중에서

철없다 철없다- 하지 마시라. 저들은 ‘피를 팔아’ 입학에 어울리는 예를 갖출 정도였다. 진짜다. 그건 오랜 전통이기도 해서 사실- 그들에겐 그다지 결의에 찬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선배가, 그 선배의 선배가, 선배의 선배의 선배가, 그리 했었다. 그렇게 맥주를 사마시고 명보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데이트를 했다. 정말 피를 쏟는 낭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대학생들은 대학을 ‘우골탑’이라 불렀다. 고향 부모님이 제 몸보다 아끼시던 소를 팔아 등록금과 경성의 하숙비를 보태주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 하면, 소처럼 공부해도 모자랄 판에- 이들은 밤거리로 흘렀다. 1930년대에, 이미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대학까지’ 나온 ‘인테리’라지만 막상 설 곳이 없었다. 그 때엔 미국의 대공황 여파로 훨씬 우등한 교육을 받은 일본인들 역시 취업이 어려웠으니까. 

이룬 바 없이 이 꼴로는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임시 수도’ ‘임시 교수’ ‘임시 교육’... 뭐하나 정해진 게 없는 ‘임시’ 사회에 사는 임시 인생이었다. 몸도, 마음도 둥둥 떠다녀야 했을 때- 그나마 어머니 손맛을 흉내 낸 안주에 술을 파는 선술집만, 늘 거기에 있었다. 밀린 하숙비를 내기 위하여 피를 팔고 남은 돈으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아무리 마시고 마셔도- 창백해진 얼굴은 쉬이 빨개지지 않았다.

허무주의와 절망에 빠져 데카르트와 니체, 쇼펜하우어와 같은 서양 철학자를 내뱉는 백인같이 하얀 얼굴엔 이질감이 없었겠지. 그렇게 시대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던 이들은 당시 ‘세느강’이라 부르는 개천에 가서 시를 읊다가- 또 부모님께 차마 올리지 못하는 전상서를 입 밖으로 꺼내다가- 노래하다-울다-웃다- 하곤 했다.

MBC '그때를 아십니까(1986)' 중에서

만나 앉아서 이야기라도 지껄이면 그 동안만은 명랑하여진다. 지금 서울 안에 P니 M이니 H와 같이 매일 만나 하는 일 없이 돌아다니고 주머니 구석에 돈푼 있으면 서로 털어 선술잔이나 먹고 하 는 룸펜의 패가 수없이 많다. (채만식,<레디메이드 인생>(1934) 중에서)

 

룸펜. 이 인테리스러운 패의 이름은 독일어에서 온 것인데, 정확히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다. 불구자, 전쟁고아, 부랑자, 유랑민 등 자본주의사회에서 거의 최하층민 계급을 뜻하는 말. 노동 능력과 의욕이 없는 이들. 수동적으로 부패분자로 분리되어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의 운동에 휘말려들 수 있는 사람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들 중에 범죄자나 매춘부도 포함되어 있으며 계급 탈락분자라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그 개념은 조금 더 통상적이고 보편화되어진다. 일본의 어느 교수는 이 계층은 노동자와 일상 생활자의 모습 그대로이며 처지와 무관한 자들이 없이 모두 잠재적 룸펜이라고 했다. 

김남진 작가 작품

193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엘리트 인생을 꿈꾸며 소도 팔고 피도 팔았다. 누가 과연 이들에게 의욕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는가? 허망해진 이들의 맥주잔에 누가 감히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한국전쟁 중에도 대학들은 부산 어딘가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강행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학교는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이 사회의 유별난 교육열은, 인테리 룸펜들이 허망함에 빠지는 데 더 큰 몫을 했던 건 아닐까. 배움은 이 한 몸을, 바칠만한 것이구나 하고.

그렇게 피가 빨려서는 흡혈귀처럼 맥주를 마시고 또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영화관을 돌고, 근처에서 야바위를 하고, 책을 팔아 쌍과부집에 가고, 치킨카츠 같은 걸 사먹고, 또 피를 팔았더랬다. 

MBC '그때를 아십니까(1986)' 중에서

그 돈으로 보았던 영화를 또 보고, 또 보는 것이 과연 감명 깊어서였을까? 마땅히 할 일이 없었으며- 그렇게라도 현실을 잊고 싶었고, 현실과 다른 것을 보고 싶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보았던 영화는, 새롭지 않았다. 고착화되었으며, 변함이 없었다.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지만,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서 한결같은 짓을 하는 비비안 리와 클락 게이블. 그걸 보던 룸펜들이 자란 자리에, 지금 룸폰들이 있다.

룸펜[lumpen]은 실업자를 뜻하는 독일어이다. 국어 발음상 다른 식으로 맘껏 풀이해보면 room + pen. 방에서 펜을 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땐 이력서든 편지든 일기든 뭐든 펜으로 적었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지금의 세대는 룸폰(room + phone)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방에서 스마트폰으로 강의를 듣고, 알바를 알아보고, 방을 구하고,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깐 말이다.

룸폰들 역시 극장에 걸린 최신 영화를 즐기고, 요즘 해외에서 인기 있는 차트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유행하는 기장의 아우터를 사고, 콜드브루 커피를 좋아하며, 수제 맥주나 와인을 즐겨 마신다. 날씨가 좋을 땐 한강에 가줘야지. 아, 물론 가장 중요한 스마트폰은 거의 최신형으로 유지한다! 그래야 이 순간을 제대로 간직할 수 있으니까.

철없음? 우아함? 맙소사, 우리의 낭만은 낭만적이지 않아요!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섭섭하게 시리- 룸펜이었던 분들이 하실 말씀은 아니잖아요. 돌이켜보니 추억이지, 그 당시에 팔에 꼽는 주삿바늘이 낭만적이었나요? YOLO? 낭만? 청춘? 아니, 사실 우린 좀 부지런히 살고 싶다구요. 대신, 최소한의 보람이 있는 일을 하면서.

[Pixabay / CC0 Creative Commons]

일본에 어느 젊은이는 ‘일하면 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기는 중입니다.’라고 말했단다. 철없어서 맛집 투어를 다니는 게 아니다. ‘먹는 게 남는 거’라 그러하다. 오늘은 뭐했는지, 매일이 모호한 하루를 사느니 차라리 맛있는 거라도 먹었다며 기록이나 하려는 거다. 그리고는 운동을 간다. 외모도 스펙이라니까. 

그런데 운동을 하고 또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 속상함에 입에 털어넣은 치맥 때문이지. 누군가 술을 마시고 또 마셔도, 살색이 창백한 거랑 뭐가 그렇게 많이 다르다는 것인가! 오히려 낭만은 그대들의 몫이었소. 우린 낭만도, 돈도, 아무것도 없소. 우골의 탑만큼 쌓인 학자금 대출밖엔. 

어쩌면 지구별이 아름다운 건, 우아한 낭만주의자들 때문이 아닐까? 밤마다 등불을- 혹은 스마트폰을 밝히며 이 밤을 노래하는 청춘들, 아니 노래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부지런을 떨 필요가 없다. 일찍 일어나면 배만 더 고프지. 느릿느릿 고상한 시간을 보낸다. 온 지구 전역에 팽배한 이러한 낭만적 분위기에, 그 많은 행성이 지구 주위를 떠도는 건 아닐까. 

1975년 12월 세밑 풍경 (사진=동아DB)

그래 별들아, 참 아름다워 보이지? 나도 그 느낌 이해해. 내가 멀리서 보았던 경성(京城)은, 빛나고- 또 빛나는 경성(景星)이었거든. 그저 거기 머물러 지구의 화려함을 감상하렴. 어차피 우린 어김없이 우아할 테니. 피치 못하게, 낭만적이어야 할 사정이 있거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인 ‘낭만’에 대하여 글을 썼는데, 왜 늘어지는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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