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한다.” - 장 폴 사르트르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하신 분이 적절한 나이에 그에 걸맞은 직함을 가진 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우린 그런 분들을 교수님, 박사님, 회장님, 선생님 등으로 부른다. 아빠 나이 또래의 분들이 그럴만한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응, 박회장.’‘어, 조회장’‘아이고 김회장’이라고 했다. 평생 사진 찍어 온 아빠가 무슨 회장들을 그리 많이 아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서 하루는 아빠에게 방금 전화 온 회장은 무슨 회장이냐고 물었다.

“**협회 회장이야.”

(= 영화<인턴>중에서)

역시 그랬다. 기업체가 아닌 어느 ‘협회’의 회장. ‘회’의 장이니, 회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빠도 **협회 회원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랬다. 그럼 아빠가 굳이 회장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 그거까지 물으려다가 그만 두었다. 그냥 어른들은 그런 직함으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분들도 아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굳이, ‘지 감독’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내가 나이를 먹어서 나의 친구들이 ‘해수야’라고 부르지 않고, ‘지 작가’라고 부르는 건? 좀 별로일 것 같다. 23살부터 작가였고, 어딜 가든 작가소릴 듣는데 너희까지 그럴 거니.

어느 날은 심심해서 아빠 지인분이 회장이라는 협회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난생 처음 듣는 협회였기에 몹시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별로 공신력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여기에 흥미가 동한 나는, 이런 저런 협회들을 검색해보았다. 우리나라엔 정말 많은 협회와 연맹, 위원회가 있었다. 그만큼 ‘회장’과 ‘위원장’들이 많단 이야기일 것이다.

늘 그렇듯 연말엔 수많은 시상식이 치러진다. 각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 수고했다며 자축하고 응원하며, 또 탁월한 성과를 낸 이에게 박수를 보내는 자리다. 대중문화 관련 시상식엔 대중 역시 주최자이나 주체자다. 어릴 적 이맘때면 가족 모두가 TV앞에 모여, 올해 가요대상은 누가 받을지 연기대상은 누가 받을지 서로 내기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시상식 속에 뭔가 인상적인 콘텐츠가 있을 경우엔 그것을 클립으로 감상할 뿐이다. 멋진 축하무대 혹은 수상소감.

심지어 시상식이 너무 많다. 방송사가 늘어나고 플랫폼이 다양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난생 처음 듣는 협회나 연맹에서도 시상식을 주최하여 시상식을 벌인다. 이사장이나 위원에 이름이 알만한 셀러브리티나 연예인을 앉혀서는 어느 정도의 면을 세운다. 시상식만큼이나 수상자들도 다양했다. 누구나 알만한 그 분야의 저명한 이의 이름을 수상자로 부른다. 그럼 참석한 이들이 더욱 놀란다. ‘그 사람이 여기 왔다고?’ 안타깝게도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불참했단다. ‘그럼 그렇지!’ 이들의 표정이 이 시상식의 권위를 대변한다.

과거엔 그렇지 않았었다. 초등학교 때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며, 김사랑이 올해 진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정말, 제일 예뻤다. ‘미스 코리아’ 같았다. 그 이후에 ‘미스 코리아’선발대회 아니, ‘코리아’같은 범국가적 이미지를 주는 대회에 대한 신빙성이 점점 깨어지더라.

국내에서 EDM 페스티벌의 ‘원조격’이라 불리며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이하 월디페)’은 사실 국산이다. UMF(울트라 뮤직 페스티벌)처럼 세계 주요 도시에서 펼쳐지는 축제가 아니다. 2007년 서울시의 지원으로 주최된 하이서울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으며, 원래는 ‘서울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이었다.

(=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 공식 페이스북 )

그래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나 월디페는 체계적이고 그 이름이 아깝지 않은 편이다. 나의 이목을 끌었던 건, ‘코리아-아시아-대한-국제-월드’같은 어마어마한 단어를 걸어놓고는 보는 사람을 더 민망하게 만드는 수준의 일부 행사들이었다. 그 행사를 주최한 단체의 이름 역시 글로벌했다. 물론 그 상패의 권위는 ‘그들만의 축제’에서만 빛날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밌는 건, 저명한 어워즈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종상 영화제 역시 그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 수많은 영화인들이 불참석했었으며, 영화제 자체 콘텐츠에 대한 논란 역시 많았다. 수많은 영화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영화를 사랑하는 대중들이 이 시상식을 외면했던 가장 큰 까닭은, 영화인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축제 같았기 때문이다.

아시아 최대 영화제라 불리는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 역시 한동안 몸살을 앓아야했다. 2014년 당시, 부국제에서 영화<다이빙벨>을 올리지 말라는 정치적 외압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주최 측은 예정대로 상영하였으며, 이후 예산이 삭감되었고 위원장은 해임 당했다.

이후 부국제의 자율성을 보호, 아니 되찾으려는 영화인과 영화 팬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1996년, ‘작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를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된 축제였다. 많은 이들의 숨은 노력으로 성장해 온 영화제다. 감히 누군가의 검은 손에 휘둘릴 게 아니라는 얘기다.

( = 칸 영화제 공식 사이트)

해외 유수 영화제라고 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공정하다고 할 순 없다. 이것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닌가. 각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들은 그 해에 초청할 영화들을 찾으러 다닌다. 우리나라의 부국제 같은 영화제에서 그 대상들을 찾기도 한다. 베를린, 칸, 그리고 베니스. 그들 역시 어떤 영화를 초청할지 저들끼리 눈치싸움을 한다. 초청받은 영화의 관계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밀당’이 존재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는 베니스 영화제다. 이 영화제에 파시즘 정부가 개입되어 정치색이 강해지자, 여기에 대항하기 위하여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개최된 것이 칸 영화제다. 베를린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가장 늦게 출발하였는데, 거기엔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1951년 탄생한 이 영화제의 목적은 동서 유럽 문화권을 화합하고 독일 통일을 기원하는 것이라 알려졌었다. 그러나 당시는 2차 대전 이후였으므로, 독일은 전후 피해 복구에 정신이 없었다. 연합국이었던 미국은 마셜정책을 펴서 유럽을 지원하였는데, 사실 서방 문화권에서는 동구권에 자기들 문화를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다!

( =유럽 부흥 계획(European Recovery Program, ERP) 또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의 공식 로고 )

오늘날에도 베를린 영화제는 정치색이 뚜렷한 영화에 호응하는 편이다. 휴양지에서 개최되는 칸 영화제가 화려한 분위기라면, 베를린 영화제는 베를린의 고취다운 예술 영화 발굴에 더욱 집중한다.

이렇듯 해외 유수 영화제들 역시 그 배경과 내부 운영 성격이 정치적이다. 그러니 권위 있는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수상한 영화라고 해서, 그 평가 기준이 객관적이며 모두 공정했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다.

권위, 영어로 ‘authority’이다. 라틴어인 ‘auctoritas(아욱토리타스)’에서 유래했으며, ‘보증’‘신빙성’‘효력발생’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auctor-’의 의미는 상당히 능동적이다. 영어에서 ‘저자’를 뜻하는 ‘author’의 어원이기도 한데, ‘행동 하는 사람’을 뜻한다.

능동적으로 그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 명예로운 권위다. 즉, 타인들이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고도 거기에 수긍하여 효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트로피에 어울리는 명예롭고 능동적인 ‘권위’인 것이다. ‘권위주의’라는 단어에 들어가는 정치적 느낌의 수동적 권위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수동적이며 소극적인 상태는 뭐라 표현할까? 영어로는 파시브(passive)다. pass+ive. 패스, 그저 지나가는 상태라는 건데, 고통을 뜻하는 라틴어인 ‘passio’에서 왔다. 당시엔 능동적인 자와 수동적인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었기에 어원의 분위기가 다소 극단적인 면이 있다.

권위를 잃은 트로피란 그 의미가 수동적으로 바뀌었단 얘긴 아닐까? 그 자체로 신빙성이나 믿음을 주지 않게 퇴색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 수긍하지 못하며 때론 비소를 던지기도 한다.

권위,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사랑에도 권위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에 대하여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대가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우린 원하는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위신, 그러니까 사랑을 받게 되면 몹시 황홀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럴만한 사랑인지, 알고 보니 ‘대리 수상’은 아닌지, 또는 수상자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에 따라 그 사랑의 권위와 진정성 역시 달라질 테니.

( = 장폴사르트르, 1964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장폴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었다. 노벨문학상은 명실상부 최고의 문학상 중 하나다. 그는, ‘나는 언제나 공적으로 주어지는 상을 거절해왔다. 나는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든 아니든, 그의 업적과 영향력은 지금도 대단한 게 사실이다. (오히려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가 그의 캐릭터를 한껏 드러낸 느낌조차 준다)

얼마 전 <무한도전>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는, 우리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고 안 받고-의 수상 여부보단, 우리끼리 문학을 즐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맞는 말씀이다. 우리가 문학을 향유하는 그 자체로 지속적인 축제가 되며, 그 자체로 명예로운 권위가 부여된다.

때론 ‘타이틀’만 있는 트로피에는 아무런 영광이 없다. 능동적인 수긍, 축하, 그리고 권위가 없는 어느 민망한 시상식에서처럼.

올해 나는 어떤 타이틀을 얻고 어떤 타이틀을 잃었나.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스스로 묻는 혼자만의 시상식이다. 작년과 비교해 조금 나아진 부분에 진보상을 주고, 잘했다 기특하다싶은 부문에 트로피를 수여하는 거다. 영화나 소설을 세상에 내어 놓기 전에 창작자들이 그것을 수백 번 다시 뜯어보듯, 스스로를 찬찬히 뜯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더욱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스스로가 수여한 이런 진정성 있는 트로피는 과연 내년 한해를 더욱 가치 있게 하는 또 다른 선물을 가져다줄 것이다. 나 스스로를 믿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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