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세기 9:22)

[공감신문] 나, 정말 이러다 지옥에 갈 것 같다. 나도 성경을 집필한 이들처럼, 혹은 그러한 성경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어느 종파의 교주들처럼- 그렇게 상상력을 마음껏 증폭시키고 있지 않나. (그들과 다른 점이라면, 이건 나만의 상상이니 ‘믿지 마시라’하는 거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훗날, ‘저 글의 글자 수만큼 저년 엉덩이를 내려쳐라!’ 할 만큼 진노하실 수도 있다. 그래도 꿋꿋이 쓰련다. 이 글을 쓰려다보니 술이 당겨서 머그컵으로 와인 한잔 했다. 나는 방금 전보다 과감해졌으며, 더운 기운을 느끼곤 걸쳤던 가디건을 벗었다. 한결 가벼워진 어깨가, 손을 자유로이 놀리기에 적절해진 느낌이다.

유식한 우리 독자님들은 눈치 채셨겠지만, 이 글은 술에 대한 내용이다. 나를 좋아해주시는 나의 친구 분들은 이것 역시 눈치 채셨을 텐데, 아마도 이 글의 분위기는 예찬론적일 것이며, 다 읽고 나면 한잔 생각이 나실 거다. 발칙하게도. 

chema madoz 作

지난 칼럼에 ‘소주’를 언급하며 더 자료를 찾아보다가, 증류주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시작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랬다. 그런데 나는 감히, 인류의 첫 시발점이었다는 에덴동산에서도 술이 있었을 거라 상상해본다. 성서학자들 주장에 따르면, ‘에덴동산’이었을 거라 추측되는 지역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이라 한다.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과 같다는 것! 그러니 증류주가 영어로 ‘spirits(영혼, 정신)’라 불릴만 하지 않나! 

나는 이 시작이 하와가 따먹은 ‘선악과’라 생각한다. 성경에 선악과는 무지 탐스러웠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닐 지도. 에덴동산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 일구어 놓으신 것인데, 거기 탐스럽지 않았던 것이 과연 있었을까? 어쩌면 선악과는 하느님의 유일한 실패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먹지 말라 하셨던 건 아닐까? 그는 전능해야 하니까. 

원래 탱글탱글한 포도알보다 시어터진 포도알이 포도주가 되기 쉽다. 물론 그것의 향은 더욱 오묘했을 것이다. 오감을 자극하는 그것의 그로테스크함은, 굳이 뱀이 혀를 놀리지 않았더라도 하와의 손을 뻗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아담에게 권했고, 이들은 부끄러워하며 잎사귀로 몸을 가렸다.

남녀가 술에 취하면 이 반대가 아니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몹쓸 상상력을 확신할 수 있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수치심’을 얻은 것이다.

수치심이야말로 성욕의 전신이다. 수치심의 섹시함은 놀라울 정도다. 수치심이 없는 섹스는 섹시하지 않다. 종족 번식이 아닌 ‘성적 유희’를 위해 더 많은 섹스를 즐기도록 진화한 인간들은, 보편적으로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히 섹스한다. 그래서 섹스는 어두운 침실로 들어와 ‘잠자리 한다’고 표현되어졌다. 타인의 것을 훔쳐보거나 조롱하는 것, 거부당할 수 있는 것, 혹은 그런 걸 당하는 감정을 즐기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게 수치심에서 비롯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부끄러워했다. 수치심, 한자로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는 뜻이다. 그 결과,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섹스를 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하와에게 ‘잉태’의 벌을 주셨다. 이제야 비로소 그들은, 서로의 가려진 틈 사이를 궁금해하며 탐닉하게 된 것이다. 선악과에 취해 과감해진 하와는, 이렇게 인류의 시작을 알렸다.

아담 역시 벌을 받았는데, 그는 평생 땅을 일구며 일을 해야만 했다. 술 사먹을라고 일하는 우리들처럼. 

‘술을 마시면 돈을 마시는 게요, 물을 마시는 거외다.’ ( 김소월 시/<술>중에서)

수치심은 영어로 ‘shame’이며, 뻔뻔함은 ‘shame’+’less’다. 그러니 최초의 성경을 쓴 이들이 선악과를 ‘선악과’라 쓴 건 정말 적절하지 않은가. 에덴동산 것들을 공짜로 먹고 마셨다니, ‘뻔뻔’하잖아! 

영화 <셰임>

...으, 점점 지옥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드니 다른 신으로 옮겨가보자. 술을 이야기하면서 ‘디오니소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신화를 보노라면, 속상해서 한잔 하고 싶어진다. 제우스의 외도로 잉태되어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나온 그는, 헤라의 눈엣가시였다. 어린 시절, 그는 숨어 지내야 했다.

그래서 여장을 하며 자랐다. 상당히 미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술 취하면 다 이쁘고 잘생겨 보이나?) 불쌍한 그를 돌본 이는 헤르메스였다. 헤르메스는 상업의 신이자 전령이다. 오늘날 그리스 우체국의 상징 역시 헤르메스다.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신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는 소통에 대해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태생과 자라온 환경의 영향일까. 술 취한 우린 마치 제우스처럼 전지전능해지는 것만 같고- 성적 편력을 마구 부리고 싶어지며,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낼 수 있게 된다. 

전람회의 노래 <취중진담>처럼, 때로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려고 술의 힘을 빌린다. ‘나, 너를 좋아해’ 혹은 ‘사랑해’라는 말에는 보이지 않는 물음표가 있다.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겠니?’, ‘나의 사랑을 받아주겠니?’ 라는 뜻의 물음표.  

영어에서 (술)마신다의 표현인 ‘drink’에 대한 불명확한 썰 중에, ‘to draw’가 그 어원이라는 얘기가 있다. to draw, ‘-하게 이끌다’는 뜻이다. 승낙을 바라는 표현이다. 때론 누군가에게 술을 권한다는 건, 우리의 요구를 받아주길 원함이다. 이번 우리 회사의 제안을 받아주세요, 나의 사랑을 받아줘, 혹은... ‘한잔만 더 하자-’고 한다. 나와 조금만 더 같이 있어줘, 라는 뜻이다. 

이러다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안돼요!’라고 말하던 이도, ‘안 돼요, 되요..되요...되요...’하게 된다. 우린 이 위험성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 술이 웬수라 치자. 

키스의 기원에 대해서도, 단호함을 무너뜨리는 술의 습성과 연관된 것이 있다. 아주 예전에 여성에겐 음주(당시엔 포도주)가 허용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키스했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그 의심의 역사가, 로맨틱한 키스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영화 <사관과 신사>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탁월한 인간은 비유하는 인간’이라 했다. 비유한다는 건 또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행위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양파 한 뿌리’를 천국으로 가는 동앗줄이라 했고, 어느 영화에 나오는 불안한 커플에게 이 작품의 감독이자 주연인 우디앨런은 ‘양파 농장’을 해보라 권유한다. 이들에게 양파는 천국인 것이다! 우디앨런은 분명 도스토옙스키의 비유에 감응한 것이며, 우디앨런에 감응하는 나 역시 언젠가 맛있는 천‘국’을 요리하는데 양파를 썰어 넣을 거다.

수많은 작가들은 취해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작가 6명 중 4명꼴로 알코올중독자였단다.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다 주정뱅이였다. 미술가나 음악가도 마찬가지다. 반 고흐는 자기 귀를 잘라버렸지. 고흐만큼 슬펐던 건 아마도 저 멀리서 그를 사랑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저 잘생긴 귀가 떨어져 나가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그러나 이제 그녀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겠지, 망할 압생트.

술은 우리의 판단 능력을 저하시키며 뇌에 손상을 일으킨다는데, 위대한 예술가들은 어쩌면 저리 탁월할 수 있었을까? 이 역시도 하와가 얻은 섹스처럼, 얻어 걸린 거다. 

판단력과 집중력을 저하시키는 술은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마치 뇌손상 환자나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같이 정신이 흐트러진 이들은, 평소에 무게를 두지 않던 하찮은 것에 관심을 갖게 된다. 무진장 쓸데없는 것들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아무 생각 대잔치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안도현 시인은 간장게장으로 시를 지엇고, 슈베르트는 송어를 가지고 작곡을 했다. 

‘숱한 여자들과 잠자리를 한다. 아름다운 여자들과. 그리고는 점잖은 시 몇 편을 쓴다. 맥주나 더 마신다. 점점 더 많이...(중략)... 맥주는 한결같은 혈액이다.’(찰스 부코스키 시,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중에서)

이쯤 되면 술은, 하느님이 이 땅에 내리신 최고의 창조물이 아닐는지! 잘 나가다 스텝이 엉킨 탱고 같은 술! 

예술가들은 술을 마시며 주酒님이 주시는 달란트(talent)를 받을 수 있었다. 마태복음에, 어느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당시 큰 가치의 돈)를 나눠준 얘기가 나온다. 어느 종은 그것을 장사로 불려 와서 칭찬받고, 또 다른 종은 그것을 땅에 묻었다가 그대로 가져왔다. 주인은 그를 게으르다 꾸짖으며 말했다.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25장 28-29절)

...아! 달란트는 쓰고 또 써야 하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지금보다 더 부지런히 마셔야 하는 건가?

아담과 하와의 자식이었던 카인의 후예 노아는, 하느님께 은혜를 받은 자였다. 오늘날 그는 ‘노아의 방주’로 유명하다. <창세기>의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노아에게 하느님은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증거가 ‘무지개’다. 

이렇게 대단한 의인 노아의 이야기는 상당히 허무하게 끝난다. 역시, 술이 문제였다. 가나안 땅에 자리 잡은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었고, 어느 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었다. 아들 ‘함’이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다른 두 형제에게 알렸는데, 두 형제는 아버지의 하체를 감히 보지 않고 옷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창세기 9:22)

술이 깬 노아는 아마도 이불킥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거다! 그런데 이 치졸한 노아는 아들 함에게 민망해할망정 화가 나서는, 가나안의 저주를 받으라 했다. 맙소사, 아들에게 ‘Go To Hell!’을 외치다니. 이러한 노아는 950세에 삶을 마감했다. 

...성경을 읽노라면 감히 추측하건데- 이 책을 쓴 이들 역시, 주님의 달란트(talent)를 풍족하게 받은 자들이 아니었을까? 어떤 주님인지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반 고흐, <카페 테라스>

재능 많은 리플리(The Talented Mr.ripley)는 초라한 현실보다 멋진 거짓이 낫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리플리는 디키에게 째즈만 배웠지, 술은 배우지 않더라. 그랬더라면 초라한 현실을 멋지게 볼 수 있는 흐트러짐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네가 초라해진 거야, 리플리. 넌 남을 따라할 줄만 알고, 비유는 모르는 탁월치 못한 인간이었지. 너에게도 양파 한 뿌리가 있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날, 한 학생이 나의 SNS를 보았는지, ‘선생님은 술에 강해요?’하고 물었다. 난 아니라 대답했고, 야유가 쏟아졌다. 난 고백했다. 

“난 술에 한없이 약해. 그러니 외면하지 못하지.”
2002년 월드컵 때 태어난 이 친구들은 내 말을 이해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 글은 전혀 문학적이지도 취하지도 않은 글이다. 왜냐하면 하찮은 것이 아닌, 나에겐 너무도 절대적인 것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 <와일드가 말하는 오스카> 중에서

‘술은 부채이외다, 술은 풀무외다. 풀무는 바람개비외다’ (김소월 시, <술>중에서)

부채도, 풀무외도, 바람개비에도 관심이 없던 나는, 아마도 이 글을 쓰고 난 후엔 흐트러질 준비를 할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그윽한 관심을 드리워야지. 부채에, 바람개비에, 술에 이는 바람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바람이다. 증발된 후 그렇게, 자유로이 여러 곳에 닿아서 하찮은 뺨을 부빌 것이다. 나는 또 그러한 영광을 주께 드높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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