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매력은 도박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지? /보들레르요. /그렇지, 보들레르! (영화 <타짜>중에서)

[공감신문] ‘아, 담배 끊어야지. 먹고 살기 힘들다, 고니야.’ 

영화 <타짜>에서 정마담은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정마담은 고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그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 즉,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페르소나를 쓴 것이며, 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늘 철저히 설계해야 했다. 

그녀의 인간다움은 여성적 본질을 앞섰다. 응축된 복수심은 고니에 대한 사랑보다도 컸고, 평경장이 죽더라도 그건 계속 지속될 전망이었다. 이게 그녀가 얼마나 나약한 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예쁜 칼’이었던 정마담은 세상 모든 ‘악의 꽃’을 베어버리고자 했다.

영화 <타짜> 중에서

“죽은 곽철용이가 니네 아버지라도 되냐? 복수를 헌다고 지랄들을 허게? 그런 인간적인 순수한 감정으로다 접근하면 안 되지!” 

아귀 말이 맞다. 고기 값을 번다, 뭐 이런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다 접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팽배한 건 판때기뿐만이 아니다. ‘화려한 돈’이 누군가에게 금지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린 희망을 품다 상처 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복수 대상이 전혀 다르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악당이 너무 많아진 거다. 영화<타짜>는 그런 ‘순수한 감정으로다가’ 세상에 나왔던 인간들의 복수극이다. 

이 영화의 수많은 명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나 이대 나온 여자야’다. 이대까지 나온 정마담도 저러고 있다는 게, 일종의 페이소스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외려 이 때문에 그녀가 도박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지 않았을까? ‘난 똑똑하고 현명해. 잃은 것만 메꾸면 그만 둘 거야.’라는 자만심에 사로 잡혀서. 자기 권능형 도박 중독의 전형적 형태다. 

그녀는 밤새 화투를 치더라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주변에 화려한 것들을 치장해놓고 그 안에 자신의 나약함을 꼭꼭 숨긴다. 어쩌면 처음 고니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탈’이 좋아서가 아니었을까.

그녀 역시 자신이 연기하던 ‘예림이’처럼 순진했던 시절이 있었겠지. 세상이 그녀에게 수많은 악인들을 보여주기 전 말이다. 그녀는 장밋빛 인생을 꿈꾸었을 거다. 누구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이대에 들어간 그녀는 조금 더 높은 승률을 기대했겠지. 하지만 이젠, 모든 확률을 오직 판때기에만 거는 인생이 되어버렸다. 평경장, 내가 그 인간 때문에 이 길로 들었어! 그래서 돈과 사랑, 자신의 전부를 걸어 그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화 <타짜> 중에서

그렇게 평경장은 갔지만, 그녀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다. 화란이처럼 젊고 이뻤던 날도 다 지나갔다, 모두 돈 때문이었다. 그러니 돈 많은 호구들을 잡으며 세상을 향한 끝이 없는 복수를 할 수밖에. 

먹고 살기 힘들다니. 전혀 공감이 안 되는 거 같지만- 조금 이해할 순 있다. 그녀 인생의 모호한 기대감과 떨림은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타짜들과의 자연뻑 화투가 아니면, 그녀는 다 이긴다. 그녀가 모호함을 기대할 수 있는 건 ‘호구를 판때기에 앉히는 일’이다. 

모호한 ‘확률’은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질 확률이 훨씬 큰데 도대체 왜 도박을 하냐고? 도박 자체의 확률, 즉 승률은 중요치 않다. 패를 드는 순간, 확률은 ‘50:50’이다. 사실 이 정도 수치면 나쁘지 않다. 그 때 느끼는 떨림은 어떤 걸까. 달려오는 자동차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정도의 떨림? 그런 떨림이 쾌감으로 변하는 순간을 맛본다면, 과연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들은 이 떨림을 계속 맛볼 수 있다고 말한다, 판돈만 있으면. 심지어 50:50의 확률로. 그래서 보들레르는 인생의 매력이 도박에 있다고 했나.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보들레르를 ‘포레스트 검프의 초콜렛 상자’ 말하듯 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어디 판때기에서 교수 같은 이한테 주워들은 게 분명하다. 포레스트 검프와 달리, 보들레르가 한평생 ‘파리의 우울’을 겪었다는 건 모르나보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1821-1867)는 모순된 인간이었다. 금수저에 천재성까지 갖췄지만,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저주받았고 계속 그런 운명이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유산으로 해시시 클럽, 사창가에 드나들고 도박을 하며 일상을 보냈다. 그는 돈 없이 살지 못하면서, 돈을 증오했다.

여린 10대 소년을 ‘호구’로 대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서였을까? 그런 우울을 달래려면 또 돈이 필요했지만, 이미 21살에 아버지 유산을 다 탕진했다. 그래서 애증 같은 돈을 ‘악의 꽃’이라 불렀나보다. 문학은 이런 그를 버티게 하였으며, 악의 꽃도 건네었다. 그리고 다시, 보들레르는 노름판 어귀를 맴돌았겠지.  

 

모두들 내 앞에서 어떤 자는 옛날의 명예를, 어떤 자는 지난날의 미모를 호탕하게 거래하고 (...) 내 마음은 깜짝 놀랐다(...)죽음보다는 고통을, 허무보다는 지옥을 택할 것을 부러워하는 나 자신에 대해! (<악의 꽃>, 노름 중에서)

 

누구나 허무에 빠지길 원치 않는다. 살아있는 떨림을 원한다. 그래서 불확실해 보이는 확률에 손 뻗는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권태로움보다는 낫기에, 오늘도 우린 외투를 걸친다. 비단 도박뿐만이 아니다. 

주말 밤, 클럽에서 매력적인 이성에게 말을 거는 것도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이다. ‘제가 술 한 잔 사도될까요?’라는 말로 확률을 높이려 든다. 커피 쏘기 사다리 게임, 오늘 저녁 그녀의 미소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은 식당은 어디...? 모두- 불확실한 속성이다. 

면접- 특히, 오디션이 그러하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벌이는 오디션에 경쟁률이 정말 중요할까? 100만:1이지만, 혹은 50:50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모호한 것들은 대부분 50:50보다 훨씬 미비한 수준이라, ‘확률’이라하기 민망하다. ‘0:100’ 같이 보이는 게 터무니없이 많다. 

도박중독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문제다. 국내 중독자 중엔 30대가 가장 많고, 요즘은 10대들의 도박중독도 화두다. 이들의 공통점은 화려한 도시에 살고 있는, 확률 걸 곳이 미비한, 혈기 왕성한 세대라는 거다. 

요즘 청소년들은 조숙한 편이다. 열심히 산다고 다 잘사는 게 아니더라는 걸 일찍 깨닫는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천지이며,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는 것도 안다. 

사랑도 그랬다. 저 예쁜 여자가 날 좋아할 확률? 인터넷에 보니, 한국 여자들은 다 ‘김치녀’랬다. 이미 세상에 상처받은 우린 더욱 소극적이 되어, 이런 확률 게임을 하려 하지 않는다.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 이런 거 안 배웠냐고? 아니 그런 것만 보고자라서 야수성을 잃었다. ‘4차 산업혁명에 문과생 결말은 역시 카페주인’이라고 청소년들은 말한다. 근데 카페 차릴 돈이 없으면? 아니, 정말 어디서 희망을 기대하지? 기대감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주말 초저녁, 10대들은 TV앞에 모인다. 저번주 복면가왕이 또 이길 거라 배팅했기 때문이다. 500원, 1000원... 잃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겼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심지어 맞추지 못한 애들은 그를 우러러 보기도 했다. 우월감과 짜릿함은, 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남는다. 

청소년들이 어느 단면만 보고 연예인을 꿈꾸는 것도 별다르지 않다. 30대들은 조금 더 크게 배팅한다. 파리의 우울? ‘악의 꽃’은 파리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정선, 아부다비, 카이로... 세계 도시 전역에 만개해 있다.

나는 지능적인 여행가다. 처음 가는 곳에 아는 사람 없이도, 현지인처럼 즐기다오는 노하우가 있다. 이 방법은 휴양지가 아닌 도심에서 잘 통한다. 난 주로 화려한 거리에, 확 잘나가지 않는 어정쩡한 라운지 매니져들과 친해진다. 처음 온 이 곳에서 색다른 무언가에 대한 기대가 크며, 도시의 첫인상이 호의적이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대부분 나라의 어정쩡한 곳 매니져들은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어디서 묵어? 언제 왔고 언제가? 휴가야 출장이야? 와서 뭐 먹었고 내일은 뭐해? 

숙소는 근처, 어제 혹은 오늘 왔고, 근처 몰(mall)에서 간단히 저녁을 때웠지. 아참, 난 휴가차 왔는데 프리랜서라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행할 수 있어. 난 많은 도시를 가보지 못했는데... 방콕은 정말 좋아해서 여러 번 갔었어. 한번 꽂히면, 내가 좀 그래. 너도 한잔 마실래? 내가 살게. 

이때부터 이들은 나에게 상당히 친밀하게 군다. ‘여긴 최고의 도시야’라며 나에게 그 도시의 ‘확률’을 팔기 시작한다. 마치 여기선 매일밤 예기치 않은 파티가 벌어지고, 싱글들은 멋진 이성을 만나고, 연인들의 사랑은 더 깊어지며, 헐리웃 스타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나는 기대감에 사로잡힌 표정을 짓는다. 아, 정마담처럼 연기하는 건 아니다. 오늘 막 도착해서 이제 한잔 마신 여행객의 격한 리액션일 뿐. 

이들은 내가 이 도시의 확률에 배팅하길 원한다. 나만 보고 그러는 게 아니다. 내 SNS 친구들, 그리고 내 여행담을 들을 친구들까지 계산한 것이다. 내가 로컬(local)적 느낌을 좋아하는 걸 알고, 한 친구는 우릴 막차 버스를 태워 어느 아파트 옥상에 데려가주었다. 나와 내 동생은 항구 야경을 보며 맥주를 마셨다. 그는 게이였는데, 알게 된 지 겨우 30시간 만이었다. 스포츠 게임에 배팅하는 서울의 어느 청춘들처럼 그들 역시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그러려고 스마트폰을 들면서도, 낯선 이에겐 확률을 파는 것- 그게 도시다.  

작년 11월 어느 날, 홍콩 케네티 타운을 달리던 막차 버스

고니는 정마담을 사랑하진 않았지만 연민을 느꼈다. 평경장, 아니- 세상에 대한 그녀의 복수심을 이해해서였다. 아귀의 손을 찍었던 그날, 기차에 매달려 흩날리는 돈을 바라보며 고니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총까지 쏘게 하는 돈, 그가 알던 모든 이들을 죽거나 다치게 만든 돈. 그 미소는, ‘악의 꽃’에 대한 고니의 복수였다. 

영화 <타짜> 중에서

내가 정마담을 가장 나약하다고 말한 건, 복수라는 감정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 때문이다. 왜 모든 종교에서는 용서를 강조하는가. 쉽지 않아서다. 한대 맞으면 나도 때리고 싶은 게 본능이다. 복수심은 인간의 영역이고, 용서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거다. 복수는 나의 것, 용서는 사실... 신- 당신의 것이었다. 

세계 전역에 피어난 악의 꽃들은 점점 그 세력을 넓혀갈 거다. 우린 이 멍청한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 다른 것에도 확률에 기대해야 한다. 불확실한 것들이 주는 그 모호함, ‘승과 패’ 이분법의 가치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가능성!

‘어차피 세상은 바뀌지 않아’라고 굴복했다면, 우린 오늘 같은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정의, 사랑, 우정, 진실, 에로스, 감미로움, 순수함... 악의 꽃 말고도 피울 수 있는 꽃들의 종류는 많다. 

다만 김춘수의 시처럼, 우리가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고니는 말했다. ‘사랑? 어차피 그것도 다 구라다.’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가 자연뻑으로 치던 섯다처럼, 화란에게만큼은 진짜였다. 꽃을 ‘구라’라고 불렀을 뿐이다. ‘허무보다는 고통을!’ 사랑에 빠지고 싶다는 현대인들은 사랑에도 화단을 내어 줄 필요가 있다. 

나 역시 악의 꽃의 향기를 좋아한다. 그 꽃이 다른 꽃들과 어우러져 다채로운 화단이 되길 꿈꾼다. 아수라 발발타, 아수라 발발타. 도시의 우울함 속에서 나는 오늘도 이 모호함에 확률을 걸 것이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내가 키운 꽃 한 송이를 내밀 것이다. 그가 꽃이 꽃임을, 알아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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