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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힐링 캠프 입소를 거부합니다'난 울다가도 사랑주면 웃었어. 늘 나를 쉽게 다루는 건 막대사탕 같은 사랑' - 거미 곡 '어른아이' 중에서

[공감신문] 1월 중순 즈음이었나 보다.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한 사진전을 만났었다. 홍익대학교에서 주최한 전시인데, 도시 군상들을 예술품으로 해석한 발터 벤야민을 연상케 했었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었는데 그중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제목은 <Product>. 돼지 껍데기 위에 인화되어 있었으며, 피사체였을 ‘Product’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마도 ‘이창민’, 작품의 작가 본인이었으리라.

Product, 이창민(2017)

여기에 내가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어떠한 감상을 느꼈을 지 아마 다들 아실 거라 생각된다.

나는 청년이며, 내 주변의 대부분도 청년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두 아픈 건 아니다. 개인이 처한 어떠한 상황들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청년인 것도 아니다. 살면서 누구나- 또 언제나 고통 받을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청년들이 이전 세대들보다 심리적으로 가혹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몇 년 전부터 따스한 온도로 말하는 것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위로는 번져 나갔다. 청년을 위로하는 것이 번져 나갔다, 유행이 되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어느 베스트셀러의 책 제목과 같은 분위기가 매체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미생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으며, 그 좁은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힘을 내기에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세계와 나, 둘 중 하나가 변해야 한다. 세계가 변하지 못할 테니 그럼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 위로는 끝났으니 해답을 달라는 청년들에게 누군가 쓰윽- 이건 어떠냐며 내민 테마가 있다.

이를테면 어떤 책에선 가까운 일본의 청년들을 소개했다. 전 세계의 청춘들은 대부분 아팠는데(…), 그 와중에 일본 청년들은 절망 속에서 행복하다고 했다. 어떻게? 현실에 투쟁하는 대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했다. (물론 일부의 분위기일 것이다.)

에이씨 물이 반 밖에 없네, 어머 물이 반이나 있네 같은 거 아니냐고? 글쎄, 이게 과연 그런 관점으로 봐도 맞는 걸까? 비교적 오랜 시간을 살아 온 노인들보다도 달관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걸, 과연 긍정적 사고라 부를 수 있을까. 그건 성질이 아예 다르다. ‘난 여자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봐’라고 말하는 사람과 ‘무릇 욕망은 욕망을 낳는 법- 전 속세를 떠났습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예쁜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절대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친구와 한바탕 치고 박고 싸운 아이는 화가 나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어른들은 그걸 위로해준 거다. 한바탕 설움에 눈물을 쏟아 낸 아이들은 금방 거기에 마음이 풀어져버렸다. 그래서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받아들이다가- 아닌 것을 차츰 알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 ‘청년’은, 만날 사회에 궁시렁 말이 많고, 악감정을 가지기 쉬우며, 그러면서도 위로해야 할 대상 같은 인상을 풍기게 되었다. 한마디로 좀, 루저 같은.

artwork by Riikka Laakso

유행은 괜히 번지는 것이 아니다. 유행은 상품성이 있다. 책이 팔리고, ‘힐링’이란 단어를 앞세운 강연들이 쇄도했다. 필자 역시도 재작년 겨울, 수험생 대상 토크 콘서트의 출연자로 8회 정도 마이크를 잡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로하지 않았으며 대신 몇 가지 노하우나 생각들만 전달하고 내려왔다. 객석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었다. 한편으론- ‘힐링’을 여기저기 쓰는 이들이 무책임하며 참신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기성세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청년들은 YOLO를 앞세우며, ‘힐링’을 가져다 붙였다. 물론 정말 말도 안 되는 처우를 받으며 인권까지 유린당하는 청년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이의 이야길 들었을 때 과연, ‘힐링’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힐링은 이제 너무 가벼운 단어라 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진짜 작위적인 예를 들자면- 직업을 알 수 없으나 매달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해외를 다니는 어느 SNS속 스타의 최고급 스파 사진에 달리는 것이 ‘#힐링’이다, 여독을 풀기 위한. 힐링의, 힐링에 의한, 힐링을 위한 힐링.

힐링을 위한 힐링이 야기되는 이 시점에, 누군가는 그래서 마음껏 무기력 해져도 된다고 느낀다. 사회의 분위기가 이러하니 남 탓도 한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편의점 음식으로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청년을 위로하던 사회는, 진정성 있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고민했는가? 2015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언론에서 ‘청년실업’을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 이랬다. 그녀는 청년들의 문제에 대해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측근에게 특혜를 주는 데에 성실 했었다.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던 그때에도 그녀의 위로는 뭔가 와 닿진 않은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난 울다 가도 사랑주면 웃었어. 늘 나를 쉽게 다루는 건 막대사탕 같은 사랑’

가수 거미의 <어른 아이>라는 노래의 가사다. 사회 안에서 청년에 대한 위로가 모두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기업가들은 막대사탕 같은 위로를 주며 나쁜 남자처럼 굴었을지 모른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artwork by Angela Deane

누구보다도 동년배인 청년들에게 가장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고 싶은 건- 쉽게 말해서 우리, 휘둘리지 말자는 거다. 청년들은 노예가 아니라며 기계가 되길 거부하는 사이에 상품화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이미지를 활용한 누군가는, 조금 더 배부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노동이나 주거 등 청년들을 위한 사회적 처우가 개선되어 지고 있다. <Product>라 제목 붙여진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나 역시 어느 산업 구조의 커다란 톱니바퀴가 되길 원하지만, 다른 톱니와의 조화를 위해 굳이 내 톱니를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David Blazquez 'Human Shelves'

새마을 운동 분위기가 만연했던 시대 청년들은 ‘국가 경제 건설’을 위한 산업의 역군이라 칭송 받았었다. 정부에서, 사회에서 그들에게 그러한 훈장을 수여했었으며, 그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어떠한 처우에서도 열심히 일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부모 세대들이 받았던 그 훈장은 온데간데없고 일부에선 누군가의 이름만 영광스럽게 불려질 뿐이다. 모든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 훈장을 한 사람에게 헌납한 듯.

같은 청년이면서도 청년을 나약하게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슬프다. 진짜 힐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진정성 있는 위로란 무엇일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겠지만, 모호한 가짜 속에서 진심 어린 위로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진짜는 모두가 알아보는 법.’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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