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롱 소송 첫 판단기준 제시...앞으로의 재판에 기준점 될 듯

[공감신문] 성추행 피해자인 학생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가해자인 교수의 복직을 허용한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성평등의 시각으로 사안을 보는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다는 취지다.

대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에서 고정관념을 떨쳐내야 한다는 판단기준을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폭력·성희롱 피해사실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활발한 가운데 앞으로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재판에 기준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성추행 피해자인 학생들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가해자인 교수의 복직을 허용한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12일 지방의 한 대학 교수 장씨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해임 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원고 패소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고 13일 밝혔다.

컴퓨터계열학과 교수인 장씨는 수업 중 질문을 한 여학생을 뒤에서 안는 듯한 이른바 '백허그' 자세를 취하면서 답을 하고, 학과 엠티(MT)에서 자는 여학생의 볼에 입을 맞추는 등 14건의 성희롱을 했다는 이유로 2015년 4월 해임됐다.

피해 학생들에 따르면 장씨는 "뽀뽀 해주면 추천서를 만들어주겠다", "남자친구와 왜 사귀나, 나랑 사귀자"등의 성희롱을 저질렀으며, "엄마를 소개시켜 달라"는 등 상대방을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장씨는 그해 5월 교원소청심사위에 해임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심사를 청구했지만, "징계사유가 사실로 인정된다"며 기각되자 소송을 걸었다.

1심은 징계사유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고 "A씨가 계속 근무하면 여학생들에게 성희롱을 다시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해임처분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판단은 2심에서 뒤바뀌었다. 2심 재판부는 '백허그'에 대해 "수업 중에 일어났다고 상상하기 어렵고 피해자가 교수에 대한 익명 강의평가에서도 관련 언급이 없어 발생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장씨에 대한 복직을 명령했다.

여학생의 볼에 입을 맞췄다는 혐의에 대해선 피해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다른 피해자가 권유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피해자가 과연 한참 전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신고하려는 의사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는 게 그 이유다.

A씨가 여학생들에게 "나랑 사귀자"고 말한 것과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한 행위는 "피해자들이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성범죄 의혹을 받는 교수에 대한 복직을 명한 2심 판단이 잘못됐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다.

대법원은 이와 같은 2심 판단이 잘못됐다며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다.

대법원은 백허그 행위가 징계사유가 아니라는 2심 판단에 대해 "피해자가 A씨의 수업을 들었던 점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했다"며 "충분한 심리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2심이 볼에 입을 맞추었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서도 "피해자가 신고할 의사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 부분은 성희롱 사실이 발생했다는 점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근거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A씨의 발언이나 신체접촉이 해임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한 부분은 "피해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지를 기준으로 심리하고 판단했어야 옳았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교수와 학생 관계인 데다, 학교 수업이 이뤄지는 실습실이나 교수 연구실 등에서 그런 행위가 발생했고, 학생들의 취업 등에 중요한 교수 추천서 작성 등을 빌미로 성적 언동이 이루어졌다는 점,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됐다는 정황 등을 충분히 고려해 피해자의 입장을 기준으로 심리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성범죄 관련 소송을 심리하는 재판부가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성범죄 관련 소송을 심리하는 재판부가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오랜 고정관념이나 남성 중심 문화에서 벗어난 올바른 성 관념을 뜻한다.

대법원은 성희롱 피해 등을 고발하려다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2차 피해'가 생길 가능성에 유념하면서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상태로 그의 진술이 지닌 증명력을 판단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성희롱 소송의 심리와 증거판단의 법리를 제시한 최초 판결"이라며 "향후 모든 성희롱 관련 사건에서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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