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이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사라져버린 상태다. 휴식이란 다름아닌 행위의 부재를 의미한다. / 

라즈니쉬


 

[공감신문] 작년엔 네번의 해외여행과 두번의 국내여행을 했었다. 그렇게 다녀오고나서 든 생각은, 올해엔 적당히 가겠다는 것. 한 두 번의 긴 여행이면 족할 것 같다. 그 여행 중 하나는 관광이 목적이어야 하고, 또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경한 경험이길 바란다.

우리들에게 ‘여행’과 ‘관광’은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여행 둘째 날 시내관광을 한다’라고도 말하며 근소한 구별을 두지만 말이다. 또 ‘여행’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에 곧바로 ‘휴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니 연상되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은 관광화 되었으며, 그것은 아마도 휴식과 거리가 멀지 모른다.

[북마리아나 반도에서, 필자사진]

나의 작년 여행 중 ‘휴식’이라 부를 만 한 건 딱 한 번이었다. 초가을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거마비를 받고 제주에서 열리는 어느 론칭 행사에 참석하기로 되어있었다. 행사 일정은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화요일 오전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물론, 혼자 였다. 제주에 아빠가 작업실로 쓰시는 공간이 있어서 거기에 짐을 풀었다.

금요일 행사 후,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었지만 비행기를 취소하고 일주일 더 머물렀다. 중간중간 제주사는 지인들을 만나 한 두 번 저녁과 술을 나누고는 대부분 혼자 있었다.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도 알쏭달쏭하다. 그냥, 시간이 흘렀다. 그때 편의점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다녀오는데 석양이 예뻤었다. 석양을 두고 찍은 셀카에, 동생에 했던 말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여한이 없는 표정이네.’

진짜로 그랬다. 금요일 하루만을 제외하곤 완벽에 가까운 휴식이었다.

우린 ‘휴식’에 대해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휴식은 말그대로 쉬는 거다. 여행을 한다고 휴식하는 게 아니다. 여행의 대부분은 관광이다. 낯선 것과 마주하고 체험하는 것, 그 행위는 휴식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낯선 것들을 마주할 때 동물적으로 긴장한다. 이것은 아주 약간의 스트레스를 제공할 것이다. 당연하다. 사냥하고 사냥당하던 습성이 조금은 남아있을 테니.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운다.

사랑을 할 때의 마음과 비슷하다.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살찌지 않는다. 몸은 겨우 한 평 안에서 안절부절 하면서도, 마음은 밤낮없이 분주하다. 심지어 온몸이 잠을 잘 때에도, 사랑하는 이의 꿈을 꾸기도 한다! 권태로움을 느끼는 어느 부부의 마음과 다르다. 그들은 낯설지 않으며, 서로에게 새로운 걸 기대하며 캐리어를 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올해 꿈꾸는 두번의 여행 모두,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 Marc Chagall <Lovers In Blue Sky>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 그저 아내는 방에 놓여 있고 / 나는 내 자리에서 내 그림자와 함께 / 육중하게 어두워지고 있을 뿐이다.’ 

– (도종환 시 <가구>중에서)

사실 진정한 휴식이라면 저렇게 가구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저 가만-있어야 한다. 사랑은 힐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휴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힐링은 휴식이 아니다.

미국의 작가 오쇼 라즈니쉬는 휴식이란 행위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했다. 아무 행위도, 없어야 한다. 휴식을 위한 여행에서는 종일 관광을 하며 문화적 상대성, 미식, 밤 문화, 숙박 업소의 서비스 등에 대한 견문을 넓히려는 행위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린 가만히 있는 걸 견디지 못하게 훈련 되어져 왔다. 그러면 왠지 아깝고, 스스로가 도태되고, 쓸모 없어질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길들여진 건 아닐까.

이전에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개 팔자가 상팔자’라 말해본 사람은 개가 사는 방식을 안다.  음, 좀 더 인간답게 ‘한량’이라 하겠다. 우리에게도 한량의 기질이 있었을 거다.

사실 요즘은 왠지, 벌면- 떠나야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거의 매일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도 연휴가 되면 부지런히, 어딜 간다. 그러나 집순이-집돌이 체질이 아닌 사람이 있듯, 여행에서 ‘휴가’기분을 만끽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어떤 이들은 낯선 곳에서 발휘되는 예민함이나 창의력을 업무적으로 쓰기도 한다. 긍정적인 효과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든 어쨌든 사회는, 여행을 계속 강요할 지 모른다. 여행만큼 다양한 산업들을 사고 팔수 있는 행위가 과연 또 있을까?

교통과 숙박, 요식업은 물론이요, 로밍을 통해 그 나라 통신망도 이용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여행오는 관광객들은 의료, 구체적으로 ‘성형’에 돈을 쓴다. 심지어 씀씀이에 쿨 해진다, 이 여행은 온전히 ‘나’를 위한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니 여행을 강조할 수 밖에!

마치 보상심리를 이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전에 필리핀에 다이빙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요트에 있던 한국인 아저씨가 기억난다. 그는 필리핀 직원들에게 상당히 무례했다. 갑자기 한국어 욕이 들리자, 멀찍이 있던 나도 기분이 나빠져서 그를 쏘아보았다. 민망해진 그는, 자긴 황제 다이빙만 해봐서 그렇다고 했다. 원래 다이빙할 때 장비 체크/셋팅은 본인이 하는데, 황제 다이빙은 이런 걸 다 풀서비스로 해주는 걸 뜻한다. 근데 그 아저씨가 다니던 곳은 욕도 들어주는 곳이었나 보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들이 받는 대부분은 ‘욕 값’이었을 거다. 그 욕도 계속 먹다 보면, 손님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일까? 무슨 억하심정이 저리 많아서- 얼마나 사랑받지 못했으면 저러나 싶을 거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한국서 갖은 모욕을 겪어낼 때마다, 필리핀의 파아란 바다를 떠올렸을 지 모른다. 어휴, 연휴만 되어봐라- 가서 황제같이 굴 테다! 네로를 보여줄 테다! 그러니 이까짓 것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자… 그런데 알아 두셔야 할 건, 이 귀에서 저 귀로 바람이 스치는 사이- 축축한 마음엔 그 먼지가 다 묻어버렸다는 거다.

진정한 여행을 떠나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과장되지 않은 여행을 알 수 있다. ‘이러려고 노동했다’는 보상의 행위도 아니다. 여행 자체가 목적인 여행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북마리아나반도 로타섬, 필자사진

우린 이미 너무도 많은 걸 하고 있진 아닐까. 쇼펜하우어가 말하길, 잠은 죽음으로부터 빌려오는 것이랬다. 그러니 잠을 휴식의 범주에 넣을 순 없다. 온전히 깨어 있을 때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니, 누군가는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런 이들이라면 어서 스스로를 가엾게 여겨주어야 할 것이다. 그는 어느 곳에서든 평화가 노크하는 소릴, 듣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여행은 불청(不聽)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