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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목사님, 왜 화를 내세요?

[공감신문]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직 많은 단어를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착하다’는세상 모든 긍정적인 것들의 총체다. 청소를 잘하면, 깔끔하구나- 해야 되는데 착하다고 한다. 친척을 만나 인사를 잘하면, 예의가 바르구나- 해야 되는데 또 착하단다. 어른이 된 우린, 이제 안다. 청소를 잘하고 인사성이 좋다고 착한 사람인가? 상관 없잖아. 그러니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건, 다- 부모들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부모 입장에서 좋은 것이다.

=<피노키오>중에서

깔끔하고, 예의 바르고, 슬기롭고, 친절하고, 공부도 잘 하고… 이 모든 것이 ‘착하다’다. 착한 어린이로 인정받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한다. 형보다, 동생보다, 친구보다 착하기 위해서 자제력을 훈련한다. 거기서부터 사회에 적응하는 우리의 시민성이 나온다. 사회에서 이러한 착함을 아마도, ‘성실’이라 할 지도.

부모는 성실해지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착하라고 한다. 아이들이 착해야 부모가 성실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우린 더불어 살아야 하니, 필수적인 덕목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부모가 성실하기 위하여 양육에 적극적이지 못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이 그랬을 것이다. 또는 학업 성적에만 신경을 쓰고 인성 교육은 간과했을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부모님은 그걸 주일날 교회에 맡긴다.

난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교회에 갔었다. 그냥 가야 되는 줄 알았다. 교회를 직접 고르지 않았고, 엄마가 데려간 교회에 줄곧 다녔었다. 그러다 중학교때 동네 외국인 교회에 평일날 영어를 배우러 갔다가, 거기서 주일 예배도 몇 번 드렸었다. 정말 깜짝 놀랐던 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목사님이 막 엄청 거룩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 하긴- 하나님이 거룩하지 왜 목사님이 거룩한가(!) 그의 설교 역시, 이전에 듣던 것들과 달랐다. 진짜 성경 얘기만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나라에 너무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 이외의 것을 이야기한다는 거다.

목사는 사역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이고, 주의 종이라 한다. 근데 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할까? 어쩌면 그것이 ‘성도’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라서 그런 것일지도. 주중에 삶에 치인 성도들이 와서, 목사님의 다그침을 좀 듣고는 우린 승리할거고 어쩌고- 희망적이고 편안하며 어렵지않은, 게다가 이 시간에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야길 누가 싫어하겠나.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짜 사랑일까? 진짜 사랑이라면- 듣기 불편하고 어려운 말도 감내해야지.

여기서 더 중요한 건-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물론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옳은 방향으로 지도해야 하지만, ‘생활 지도’보다 중요한 건 ‘종교 단체’로서의 역할이다. 왜? 교회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님, 전도사님들은 부모들이 듣기 좋아할 만한 것들을 아이들에게 말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착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이를 테면 교회 다니는 친구- 탈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런 친구.

=영화 <하얀 리본> 중에서

부모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였을 수 있다. 혹은 큰집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부모님이, ‘노인네 하는 말’이라는 표현으로 그들을 무시하는 것에 아이가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부모님은 교회 현관을 빠져나와도 목사님 욕은 하지 않는다. 목사님의 꾸짖음은 그냥 듣는다. 그렇게 부모님도 꾸짖을 수 있는 목사님이 건네는, ‘착하다’는 아이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건 하나님이 착하다고 하는 것 다음으로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영화<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주인공은 신부님이 자기에게 심부름이라도 시키면 특별한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할 것은, 만일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경외해야 할 대상은 성경이지- 목사가 아니라는 거다. 불교, 천주교, 기타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어떠한 행동을 저질렀을 때에- 혹은 하지 않았을 때에 그것을 섬기는 신의 말이 다그칠 순 있겠지만, 사역- 그러니까 봉사하는 자가 그럴 권한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뜻과 신의 뜻을 구별해야 한다.

나는 지금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다시 다닐 교회의 목사는 ‘화내지 않는’ 목사였으면 한다. 무슨 권한으로 나에게 화를 내는가? 무슨 권한으로 저 성도의 자녀에게 하나님 못지 않은 듯 ‘착하다’고 말하는가?

‘종교인 성추문’의 피해 사례로, 어머닐 따라서 다니게 된 교회 목사님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딸이 있다. 이런 경우가 매우 많다. 그 목사가 제일 나쁘지만, 어머니 잘못도 있다. 어머니는 목사에게 복종과 더불어 ‘화낼 권한’을 손에 쥐어 주었다. 어머니는 분별력 없는 어린 딸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보여준 것이다. 그런 대단한 목사님이 ‘착하다’는 행동은, 만져도 가만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부 몇몇 교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건강한 교회들이 이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화 좀 줄이고 진짜 ‘설교’를 하시라는 거다. ‘이래라-저래라-‘하는 설교 말고, 교리를 말하는 설교를.

“예수께서 지금 여기 계시다면, 그 분께서는 기독교인이 되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했던 작가 마크 트웨인

이전에 난 학교에 가고- 집에 혼자 계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셨나 보다. 마침 같은 아파트에 살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지나가는 걸 베란다에서 보시고는, 나 좀 도와 달라 하셨단다. 할머니는 당시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었다.

목사님은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입원시켜 주셨다. 그때의 교회는 지역 커뮤니티였다. 그래서 목사님이 가끔 나에게 설교하는 말투로 전혀 관련 없는 잔소릴 하셔도, 동네 어른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교회에 지역 커뮤니티의 성격은 흐려졌다. 서로 아웃 오브 안중인 21세기에 무슨 지역 커뮤니티? 게다가 전세 아니면 월세라 언제 떠날 지 모르는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나에게 상처 입힐 권리를 너에게 준다는 말이기도 하다. 너라면, 기꺼이 상처받겠다고. 본의 아니게 당신이 슬픈 일을 겪어 내가 상처받을 수도 있고, 혹은 이젠 내가 싫어져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임금’을 받는 다는 건, 그 대가만큼 노동력을 주겠다는 거다.

우린 늘 이렇게 타인과 거래하며 살아간다. 종교, 사랑, 정치, 모든 곳에서- 때론 타인에게 너무 많은 권리를 준 건 아닐까? 혹은 너무 과도하게 받지는 않고 있나. 그것이 과연 한 사람의 잘못인지- 때때로 한번쯤 생각해볼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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