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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라메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책이 된다마이크 너머로 전하는 이야기, 낭독 봉사자 박정언 씨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공감신문 라메드] 책을 점자로 번역하여 인쇄하면 오돌토돌한 돌기로 채워진 하얀 점자책이 완성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이지만, 누구나 점자를 읽을 수는 없다. 배우는데 1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배우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어린아이들은 점자의 돌기에 손끝이 아프다. 그래서 소리책이 필요하다.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점자보다는 소리책이 더 생동감 넘친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은 처음 듣는 어떤 이의 목소리로 세상을 보고 감동을 느낀다.

낭독 봉사자들은 일주일에 두 시간 작은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소리 내어 책을 읽는다. 속도, 성량, 감정을 계산한다. 어려운 책을 읽을 때면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소리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해 수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2층에 자리한 성북점자도서관에서 3년째 낭독 봉사를 하는 박정언 씨를 만났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소리책 낭독 봉사를 하는 박정언 씨 /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작은 방이 있다. 방을 꽉 채운 책상을 제외하면 겨우 한 사람이 앉을 정도다. 모니터 앞으로 마이크가 놓여있다. 녹음실에 불이 켜지고 마이크 앞에 앉은 박정언 씨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책을 한 줄 한 줄 정성껏 읽어 내려간다. 녹음 중인 책 『왕세자의 깊은 사랑』의 한 구절이다.


샤를이라고 이름 붙인 왕자는 주변의 축복을 받아 건강하게 자랐다.

“어머니!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샤를님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왕자님이군요. 다정한 어머니가 왕자님을 무릎 위에 앉히고 책을 읽어 주시니까요.”

뤼시앵이 샤를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는 기쁜 듯 방긋 웃었다.


정언 씨는 사람들이 이걸 들으면서 영화 한 편이 머릿속에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성공이다. 외국영화를 더빙하는 성우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듣는 듯하다. 샤를 왕자가 당장이라도 저쪽에서 걸어 나올 것 같다. 실감 난다.


말로 설명해야하는 요가

“일반인들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돈을 들고 찾아가면 돼요. 그런데 장애인은 그럴 수 없어요”

낭독 봉사를 시작한 것은 2016년이다. 하지만 성북점자도서관과의 인연은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정언 씨는 10여 년 전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가 수업을 하던 요가 강사였다. 재능기부였다. 직장 상사에게 우연히 얻은 『원정혜의 힐링 요가』라는 책으로 요가를 시작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몸도 좋아졌어요.”

오랫동안 취미로 하다가 2007년에는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요가 강사가 되었다. 요가 강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돈을 들고 찾아가면 돼요. 그런데 장애인은 그럴 수 없어요.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기 일쑤죠.”

지체장애인과 자폐 아동,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가를 했다. 눈으로 요가 동작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요가를 가르치는 것은 특히 어려웠다. 당시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요가가 없었고 정언 씨는 처음부터 혼자 만들어가야 했다.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눈을 감고 해보니 눈뜨고 살던 사람이라 균형이 안 잡히더라고요. 제가 수업하는 대로 녹음을 하고 들어봤어요. 몸의 각도, 손가락 모양, 움직임의 방향. 눈으로 동작을 볼 수 없으니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해야 해요. 너무 자세하면 머리가 아파요. 말하는 속도도 조절해야 하고 단어도 세심하게 골라야 했어요.”

어쩌면 그때부터 정언 씨의 녹음이 시작된 셈이다.


마이크 너머의 독자

“대화를 하고 싶은데, 수다는 싫었어요.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같이 할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결혼과 이사, 그리고 바빠진 일 때문에 요가 봉사를 더는 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정언 씨는 왼쪽 어깨 인대 파열로 수술을 받았고, 더는 요가 수업은 하지 못했다. 대신 어릴 때부터 관심 있었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화센터에서 두어 달 배우고 혼자 그렸는데, 대한민국현대미술대전, 서울미술대전 같은 유명한 대회에서 상을 타고, 전시도 했다. 타고난 체력이 좋지는 않은데 새로운 일을 좋아하고 아주 열심히 하다 보니까 몸에 무리가 됐다. 대상포진이 왔다.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었어요. 일주일 만에 나았지만, 그때 떨어진 면역력이 회복이 안 되더라고요.”

그 후로 그림도 요가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게 싫었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아까웠어요. 대화하고 싶은데, 수다는 싫었어요.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싶은데, 같이 할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체력적인 소모가 심하지 않으면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다가 낭독 봉사가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전달력이 좋고 성우 같다는 칭찬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어요.”

낭독 봉사를 하기 위해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을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책 그리고 마이크 너머의 독자와 의미 있는 대화를 시작했다.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목소리 연기에 눈뜨다

“목소리로 연기하는 맛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처음 읽게 된 책은 『신비소설 무』(문성실, 달빛정원)였다. 정언 씨가 처음 읽은 판타지소설이다. 사실 판타지는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었다.

“12권이 완결인데 이걸 다 제가 녹음했어요. 소설이니까 목소리 연기가 필요했어요. 처음이니까 살짝 부담됐지만 설렜어요. 묘한 느낌이었어요.”

조카 동화책 읽어주던 생각도 나고, 요가 명상 내레이션 하던 생각도 났다. 정언 씨는 잘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들었다. 녹음하게 되면서 지하철과 집에서 책을 읽었다.

“캐릭터를 분석하고, 등장인물을 연습하면서 목소리로 연기하는 맛에 점점 빠져들었어요. 어린애가 신나는 놀이를 처음 발견한 기분이었죠.”

낭독봉사를 하며 다양한 책을 읽었다. 역사서, 시집, 철학서, 불교 법문, 기도문, 국가고시수험서, 소식지, 뉴스. 장르와 종교를 넘나들었다.

“처음에는 연기가 있고 내레이션이 있는 소설류가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시집과 역사서, 수험서를 읽는 감정이 다 달라야 했어요. 그래서 이 모든 게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언 씨는 도서녹음이 너무 재미있다.

소리책을 녹음하는 박정언 씨 /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글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이 살면서 가졌던 철학과 지혜가 다 책에 녹아있는 거잖아요.”

책을 듣게 될 시각장애인들이 그냥 흘려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감명 깊은 문구가 마음에 남아 인생에 도움이 되길 바랐다.

“라디오를 자주 들어요. 특히 KBS Classic FM <장일범의 가족음악>을 좋아해요. 진솔하면서 따뜻한 음성이 감동적이었어요. 장일범 씨처럼 제 목소리가 꽉 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성우로, 배우로 한 발 더

“도서녹음은 죽을 때까지 할 거예요”

정언 씨는 낭독봉사를 하며 자신의 재능을 확인했다.

“예체능형 인간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연기를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KBS 성우 아카데미를 등록했다. 사실 새롭게 도전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이왕이면 프로답게 하고 싶었다. 2017년 1년을 꼬박 다녔다.

“성우수업을 듣고 처음 녹음했던 내용을 들어보니까 속도, 완급 조절 등 미숙한 부분이 느껴져요.”

정언 씨는 오글거린다는 듯이 손짓을 한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성우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영화나 종편 진행자에 도전해보면 어떻겠냐는 추천을 받았다.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하지만 별나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저 오디션 경험이 성우에게 도움 된다고 해서 KBS 방송연출 공개오디션에 도전해봤는데 결과가 좋았어요.”

단편영화 『모자』에서 비중 있는 디자인 실장 역할을 맡게 됐다. 단편영화 7편, 드라마 2편, 뮤직비디오 1편에 출연했다. 상도 받았다.

“독립영화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해보고 싶어요. 도서녹음은 죽을 때까지 할 거고요.”


주고받는 마음

“봉사는 어떤 사회생활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깊이가 있었다”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소리책을 듣고 있는 시각장애인 / 사진 = 정현우 사진기자

정언 씨는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요가가 주는 차분함을 전하고 싶었다. 소리책을 만들어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와요. 내가 잘하는 거고 재능이 있으니 도움을 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막상 해보면 봉사라는 것도 사회생활이더라고요.”

결국은 모든 일이 사람과의 일이라고 말한다.

“도서녹음도 방에서 제가 혼자 하는 일 같지만, 피드백이 들어와요. 그걸 듣고 힘든 일이 녹아 없어지기도 해요. 주러 왔는데 계속 받는 거예요.”

정언 씨에게 봉사는 어떤 사회생활보다 따뜻했다. 그리고 깊이가 있었다.

“마음을 열지 않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저를 무한 신뢰해준다는 기분 들어요. 그분들이 주는 마음이 저를 굉장히 편안하게 해주더라고요. 그게 사랑인 것 같아요.”

가족이나 친구들이 주는 사랑이랑은 조금 다르다. 너무 가까운 사람들이 주지 못하는 그런 감정이다.

“그런 마음이 저를 강하고 깊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줘요. 많이 배우고 성장했어요.”

오랜 시간 시각장애인들과 함께하며 그들과 쌓아온 관계 속에서 정언 씨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을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낭독 봉사가 타인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여다볼 기회가 된다. 천천히 집중해서 글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스스로 마음을 곱씹어보게 된다.

“지금은 지금 하고 있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낭독과 연기. 또 바뀔 수도 있어요”

인터뷰를 마친 정언 씨는 『왕세자의 깊은 사랑』을 마저 읽으러 녹음실로 들어간다.

    임준 기자 | ij@go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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