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력이 미약했을 때 강대국 야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그곳

정환선 궁궐길라잡이

[공감신문=정환선 궁궐 길라잡이] 창덕궁은 크게 전각 부분과 왕실의 정원인 후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전각과 후원을 관람하려면 입장권을 사야 한다. 후원의 입장과 해설 출발 지점은 성정각의 자시문 지나 함양문이 있는 곳이다.

궁의 전각해설은 1시간이고 후원 해설은 1시간 30분 해설을 하게 되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궁과 관련된 우리들의 역사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여서 주로 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만을 주마간산 격으로 해설 할 수밖에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때문에 후원 해설 출발 전 관람객들이 삼삼오오로 모이는 잠깐의 짬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관물헌에 대한 소개를 한다.

 

관물헌(觀物軒)

관물헌(觀物軒)의 관물(觀物)은 중국 송나라 소옹이라는 학자의 만물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만물을 보고 그 이치를 궁구(깊이 파고들어 연구함)한다.”는 뜻이고 헌(軒)은 집을 말한다. 이 건물은 1826년 경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전후시기에 제작된 동궐도에 ‘넉넉하고 맑은 마루’라는 뜻의 “유여청헌”이라고 쓰여 있어 1830년 이전 정조임금 때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관물헌 편액 집희

현재의 편액 좌측 세로글씨는 갑자년(1864년) 원년 그리고 오른쪽 상단의 어제라는 글씨는 임금의 글씨라는 의미이며 예제라고 써져 있으면 세자의 글씨다. 가운데 “집희(緝熙)” 이 말은 『시경』 「대아(大雅)편의 구절에서 온 말로 ‘인격이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고종의 어릴 적 글씨로 선대왕들의 업적을 계승하여 넓히겠다는 뜻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곳은 세자가 공부하는 동궁영역으로 효명세자의 서연(세자의 공부)장소였지만 정조임금 때는 집무실인 편전과 과거에 합격한 초계문신들의 시험을 치르기도 한 장소이자 순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덕혜옹주는 1919년 고종이 붕어한 뒤 고종의 혼전(장사를 마치고 신주를 종묘로 모셔가기 전 제사를 지내는 곳)을 경운궁(덕수궁)에서 순종이 살고 있던 창덕궁 선정전으로 옮겨지게 됨에 따라 1925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생모 복령당 양씨와 함께 거처를 옮겨와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지내게 된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결하는 함양문

또한, 1884년 개혁과 정변의 소용돌이 역사의 현장인 갑신정변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종실록 21년 10월 17일(음력) 기록은 ”민영익이 우정국 낙성식에서 피습되고 김옥균 등이 일본 공사에게 원조를 청하다.“라고 적고 있다.

담장 밖 불길을 신호로 시작된 정변은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금호문을 통과하여 궁내의 침전(대조전?)에 이르러 급히 변고에 대하여 아뢰고 시급히 옮기시어 변고를 피하도록 말씀을 드렸다.

이 후 고종이 요금문을 통하여 지금의 현대 계동 사옥 뒤편 순조의 생모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사당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급히 옮겼다. 10월18일에는 종친 이재원의 집 계동궁으로 이어하였다가 청나라와 내통이 된 명성황후가 경우궁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창덕궁으로 이어할 것을 지속적으로 독촉하자 어쩔 수 없이 5시경 관물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날 저녁 김옥균 주도하에 창덕궁 진선문(進善門) 안방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14개 조항의 혁신정강을 제정하고 공포한 후 서울 시내 곳곳에 게시하게 된다. 하지만 10월19일 오후 4시경에 1,500여명의 청 병사들이 창경궁 쪽 선인문과 돈화문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관물헌의 개화당 및 일본군 200여명의 연합군사는 격전을 치렀으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오후 6시경에 고종은 후원 연경당으로 다시 옥류천 뒤 북쪽 궁장문인 건무문을 거쳐 군인들의 호위를 받아 성균관이 있는 관우의 사당인 북묘(北廟)로 향하였다.

싸울 의지를 잃은 일본군과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모두 함께 건무문 쪽으로 해서 궁을 떠났으나 홍영식과 박영교 및 생도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갔다. 밤 열시 오 통령이 북묘의 고종을 맞이하러 오자 홍영식 등이 어의(御衣)를 끌어당기면서 영방으로 가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사인교에 타고 떠남과 동시에 같이 있던 조선군 병사들에 의하여 홍영식과 박영교, 생도 7인이 죽임을 당함으로 실패한 정변으로 실록에 기록되어져 있어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

격랑의 19세기 조선의 국력이 미약했을 때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던 이웃나라들의 야욕을 속수무책으로 창덕궁 궁장의 문과 관물헌은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암담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굴곡진 우리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각각의 전각 및 궁장 문들의 역사적 사실들을 음미해 보고 우리나라가 통일을 이룰 수 있고 지속가능한 평화와 행복이 상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창덕궁 가을단풍

가을의 기후와 환경이 궁궐 관람하기에 매우 좋은 계절이다. 궁은 가을단풍이 후원에서 전각까지 들어차기 시작하면 특히, 궐내각사 금천과 어우러진 책고 옆 은행나무와 후원의 존덕정(尊德亭) 뒤에 위치하여 노랗게 물들여져 환상적인 은행나무의 자태가 관람객들을 제일 먼저 유혹하기 시작한다.

관람객들의 알록달록한 옷과 전각들의 멋들어진 배치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서정의 공간속으로 궁궐을 찾아 떠나는 나들이에 초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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