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2주년… 조국수호 헌신한 참전용사 희생정신 잊지 말아야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

[공감신문] 염보라 기자=가곡 <비목>은 서글프고 애달프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남아있던 1960년대, 전쟁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 백암산 고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한명희(83·ROTC 2기) 선생이 이름 모를 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보고 복받친 감정을 시(詩)로 옮겼고, 여기에 황해도 해주 출신의 작곡가 고(故) 장일남 선생이 음률을 붙여 완성했다. 곡은 공개와 동시에 대히트를 쳤다. 많은 사람이 손수건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그만큼 긴 세월 전쟁의 아픔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사람들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어떤 슬픔이나 응어리를 건드린 게 아닌가 싶어.” 작사가 한명희 선생의 말이다.

가곡 '비목'을 작곡한 한명희 선생 / 사진 염보라 기자

 

공감신문이 마련한 6·25 특집 인터뷰에서 한명희 선생은 백암산 고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묘사했다. 50여년이 지났음에도 기억이 흐릿해지지 않는 건, 그만큼 눈에 담긴 장면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던 따름이다.

Q.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휴전 12년차인 1964년 임관해 화천군 풍산리에서 소대장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에 자청해서 비무장지대(DMZ) GP(감시초소)장으로 갔지. 약간의 모험심이었달까. 기왕 군대에 온 거 목숨 내놓고 현장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런데 진짜 목숨을 내놔야 하는 거더라고. 남방한계선 표시만 딸랑 있고, 안전장치나 철망도 없어. 북한군하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서로 격투도 벌였지.”

“(전쟁 관련) 소설을 읽다 보면 ‘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는 표현이 있는데, 직접 보기 전에는 안 믿었어. 그런데 와서 보니까 이게 틀린 말이 아니구나 싶어. 입구 양 기둥에는 해골을 걸어놓고, 누런 LMG(경기관총) 실탄 꾸러미를 펼쳐놨더라고. 호박 좀 심으려고 삽질을 몇 번 했는데 해골이 나와.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

한명희 선생이 1960년대 DMZ에서 GP장으로 복무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염보라 기자
한명희 선생이 1960년대 DMZ에서 GP장으로 복무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염보라 기자

 

가곡 <비목>이 탄생한 건, 그 후로 몇 년 지나고 나서다.

당시 한 선생은 ‘TBC’(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 1964년 개국)에 공채 3기로 입사해 음악방송 PD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클래식·국악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후 국장을 설득해 우리 가곡을 소개하는 10분짜리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 ‘가곡의 언덕’을 기획했다. ‘그게 되겠냐’는 내부의 평가도 있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추천곡 엽서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품성을 인정 받으면서 오후 4시 45분부터 5시까지 15분간 일일 프로그램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됐다. 프로그램 명칭은 ‘가곡의 오솔길’이었다. 기존 가곡을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가곡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현재까지 사랑받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 <얼굴> 등은 이때 나온 작품이다. 

Q. <비목>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어느 날 장일남 작가가 ‘글을 잘 쓰니까 작사 한 번 해보지 그래’ 하더라고. 술 한 잔 하고 회사 숙직실에 앉아 있는데, 창밖으로 휘황찬란한 가로등이 눈에 들어오는 거야. 내가 (DMZ에서) 목격했던 비참함과는 별천지네…. (이름 모를 용사는) 20대 젊은 나이에 인생의 꽃망울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죽었는데, 나는 멀쩡하구나. 전쟁에서 희생된 청년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조금 더 철학적인, 인생의 본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지. 1년 6개월 DMZ GP장으로 복무하면서 인생의 철학을 터득한 거야.”

한 선생이 쓴 <비목>에 故장일남 선생은 음률을 붙였다. “음악성이 대단했어. 멜로디가 술술 나와. 타고난 천재지, 천재야.” 한 선생은 장 선생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한명희 선생 / 사진 염보라 기자
한명희 선생 / 사진 염보라 기자

 

한 선생은 1969년 국내 최초로 가곡으로만 꾸민 콘서트를 열었고, 이 곳에서 <비목>이라는 새로운 가곡의 존재를 알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관객석 곳곳에서 눈물이 터졌다. 가슴 한 켠에 깊이 묻어뒀던 슬픔의 감정을 건드린 결과였다.

Q. <비목>을 공개했을 때 대중의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가곡으로만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하니까 회사에서 ‘아직 술 안 깼냐’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뭐라고 했냐면 ‘언론은 사회를 밝히는 목탁이 돼야 한다.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니 밑져도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지.(웃음) 총 24곡을 공연(<비목> 포함)했는데, 그야말로 대성공을 했어. 6·25전쟁의 아픔이 진·간접적으로 다 있었던 거지. 잠자고 있던 슬픔, 비극, 응어리를 누가 건드려주지 않았는데, 이걸 건드린 거야. 내 진단은 그래.”

(왼쪽) 한명희 선생이 경기도 남양주에서 운영 중인 '이미시서원'에는 '보훈의 빛'이 빛나고 있다. 한 선생은 이 불빛이 365일, 24시간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오른쪽) 한명희 선생이 직접 제작한 '보은꽃뱃지'./ 사진 염보라 기자
(왼쪽) 한명희 선생이 경기도 남양주에서 운영 중인 '이미시서원'에는 '보훈의 빛'이 빛나고 있다. 한 선생은 이 불빛이 365일, 24시간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 (오른쪽) 한명희 선생이 직접 제작한 '보은꽃뱃지'./ 사진 염보라 기자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호국보훈의 달은 익숙지 않다. 6·25 전쟁을 모르는 이들도 수두룩 하다. 하지만 한 선생은 “시대 변천에 따른 순리적인 현상”이라면서 “노파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의 국가관이 희박하다는 건 기성세대의 노파심일 뿐이며, 의식 있는 젊은층을 믿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대신 기성세대의 노력을 주문했다. 그 스스로도 ‘보은꽃뱃지’를 제작하고, 365일 꺼지지 않는 ‘보훈의 빛’을 운영하는 등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다. 최근의 관심사는 ‘6·25 전쟁 문예 기념관’을 개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전쟁 관련 작품과 종군기자들의 기사 등을 수집 중이다. 자금 마련을 위한 모금도 계획하고 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6·25는 엄청난 역사의 소재야. 여러가지 미담이 있고 슬픈 사연이 존재하는 문학의 보고인데 여태껏 활용을 못해왔어. 안타까운 일이지. 런던 타임지 특파원이 한국 신문에 쓴 칼럼이 있는데, 한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보물창고가 있는데 관광·문화로 연결을 못한대. 객관적으로 잘 본거야. 이제는 6·25의 아픔을 객관화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 차분하게 객관화 해서 일류 보편적인 안목에서 우리꺼를 봐야 할 때야. 그러면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나오지. 특히 언론의 소임이 커. 군이, 대중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 리마인드 시켜줘야 해. 의식을 환기하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 거지.” 

한명희(왼쪽) 선생과 전규열 공감신문 대표이사 겸 발행인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염보라 기자
한명희(왼쪽) 선생과 전규열 공감신문 대표이사 겸 발행인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 사진 염보라 기자

대담= 전규열 대표이사 겸 발행인
정리·사진= 염보라 기자

한명희 <비목> 작사가 프로필

- 이미시서원 원장
- 전 국립국악원장
- 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 전 서울시립대 교수
-수상내역: KBS국악대상 출판부문(1994), 서울특별시 문화상, 자랑스런 ROTCian상(2003), 은관문화훈장(2006)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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