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마지막 붉은별, 역사에 저물다

[공감신문 박진종 기자] 쿠바는 15세기말 스페인 식민지가 된 이후 1898년 미-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명목상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을 등에 없은 독재 정권이 연이어 집권하고, 미국의 자본에 의해 지배됐다. 1959년 1월 쿠바의 산속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던 피델 카스트로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에 성공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혁명 성공후 공산주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국과 대립했다. 아울러 남미 각지에 좌파 혁명을 지원했다. 미국으로선 눈앞의 가시였다. 미국은 숱하게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시도했고, 그는 이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천수를 누리다 25일(현지시간) 90세로 타계했다.

혁명에 성공한 해인 1959년 4월20일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AP=연합뉴스
게릴라전으로 쿠바 혁명 성공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13일 아버지 앙겔 카스트로의 혼외자식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스페인 북부 갈라시아에서 쿠바로 이민온 농부로 사탕수수밭을 일구어 부자가 되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그는 가정부인 또다른 스페인 이민자 린나 루즈 곤잘레스와의 사이에서 피델 카스트로를 낳았다.

카스트로는 8세때 카톨릭 세례를 받았고, 그후 카톨릭 학교를 다녔으나,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제주이트 교단의 대학을 다니기도 했지만, 그는 종교보다 역사, 지리, 논쟁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학업성적은 우수하지 못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

1945년 하바나 대학으로 건너가 법학을 전공하는 도중에 정치적으로 경도돼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학내 폭력적 혁명운동에 가담했고, 반제국주의에 심취해 미국에 반대하는 활동에 나섰다.

1947년 카스트로는 쿠바 인민당에 가입해 사회정의, 정직한 정부, 정치적 자유를 주창했다. 독재정권이 갱단을 동원해 경찰력을 보강하면서 학생운동이 격화됐다. 카스트로도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 총을 들고 동료들을 규합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1948년에는 콜롬비아에서 발생한 도시폭동사건에 참여했다. 1953년 당시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동지 156명과 함께 산티아고에 있는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지만, 실패하고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955년 5월 특사로 풀려나 아바나로 돌아오자마자 멕시코로 망명, 바티스타 정권 타도 계획을 세웠다. 1956년 86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정에 나서 시에라 마에스트로 산속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58년봄 카스트로를 사령관으로 하는 게릴라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로 지역을 점령했다. 바티스타 정부는 1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카스트로군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정부군은 오히려 카스트로에게 투행했고, 카스트로는 서서히 공세로 전환해 수도 하바나를 압박했다.

혁명에 가담한 게릴라는 소수였다. 하지만 쿠바 백성들이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꼈고, 카스트로는 방송국을 점령해 국민 봉기를 부추겼다. 이듬해인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는 마침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독재정권을 세웠다.

그는 혁명 성공후 총리에 취임한 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한편,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했으며, 그해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했다.

혁명에 성공한 해인 1959년 4월20일 미국 워싱턴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AP=연합뉴스
냉전의 아이콘

카스트로는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쿠바의 총리를 지내고 1965년 쿠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다. 1976년부터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쿠바 혁명이 처음부터 사회주의 이상 세계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다. 카스트로는 훗날 "나는 1952년에 이미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면서도 "우리의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대기실이었다"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쿠바의 경제를 좌우해 온 미국 자본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쿠바의 새 정권은 필연적으로 미국과 충돌했고, 카스트로는 1961년 "쿠바의 혁명은 사회주의적"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1960년 쿠바 내 미국 정유회사, 제당 공장, 전기회사, 전화회사 등을 국유화했고 이듬해 1월 미국이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대사관을 폐쇄하면서 미국과 쿠바는 앞으로 반세기 넘게 이어질 대립을 시작했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쿠바의 최고 지도자로 재임하는 동안 10명의 미국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미주 대륙의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를 이끌었다.

신화통신은 최근 그가 47년간 권좌에 있던 카스트로 전 의장은 637회의 암살 공모와 164회의 실제 암살 시도를 딛고 살아남았다고 전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쿠바가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한 뒤 구소련과 동맹관계를 맺은 1960년 이후 8차례에 걸쳐 카스트로 전 의장에 대한 암살을 기획했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올림픽에 암살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61년 4월 미국의 피그만 침공을 격퇴해 군사적 승리를 얻어내고 1962년 10월엔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는 소련과 미국의 극한 대립 속에서 미국의 불가침 약속까지 얻어내면서 외교적 승리를 챙기는 면모도 보였다.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카스트로 전 의장은 총리, 서기, 의장 등 행정적 직함 외에 군사 혁명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한 '사령관'(El Comandante)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 턱밑에서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와중에도 아프리카와 중남미 각국의 좌파 혁명을 지원할 군대를 파견하며 국제적 지도자로서의 위상도 확보했다.

현재 중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좌파 게릴라인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은 콜롬비아에서의 쿠바식 혁명을 주창하며 1964년 창설되는 등 카스트로의 쿠바는 중남미 여러 나라의 오랜 내전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숱한 암살 시도를 버텨낸 카스트로 전 의장도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고령으로 죽음을 맞았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90번째 생일을 넉 달 앞뒀던 지난 4월 제7차 쿠바공산당 전당대회 폐회식에 참석 "나는 곧 90세가 되며 다른 이들과 같아질 것이다. 누구에게나 차례가 온다"며 죽음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체 게바라(왼쪽)와 카스트로 /AFP=연합뉴스

 

동생 라울에게 정권 이양

카스트로 전 의장은 건강 문제로 2006년 친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의장직을 넘기고 2008년 2월 공식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점차 건강이 악화한 카스트로는 지난해 7월 이후 9개월 간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지난 4월 초 아바나의 한 학교를 방문한 모습이 쿠바 TV에 방영됐다.

반세기 넘는 미국과의 대립,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이어진 고립을 거쳐 다시 출발선에 선 쿠바의 앞날이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따라 카스트로 혁명의 성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