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지형을 잘 활용한 궁궐…경희궁·덕수궁의 모델"

창덕궁은 본래 경복궁의 이궁(離宮, 세자궁)으로 건설됐으나 조선의 임금들이 가장 사랑한 궁궐이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 건물은 대부분 소실됐는데, 전란이 끝난 뒤 선조가 재건을 지시한 궁은 창덕궁이었다.

그런데 창덕궁과 경복궁은 건물 배치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을 통과해 근정문을 지나면 정전인 근정전이 나온다. 일직선 상에 건물이 배치돼 있고, 좌우 대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국 주대의 궁궐 모형을 충실히 따른 결과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조성되지 않았다. 정전인 인정전에 가려면 돈화문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진선문을 지나고 다시 북쪽의 인정문을 거쳐야 한다. 무작정 앞만 보고 걸어가면 정전과 만나게 되는 경복궁과는 차이가 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여는 특별전 '영건, 조선 궁궐을 짓다' 개막을 앞두고 4일 발간한 전시 도록에서 조재모 경북대 건축학부 교수는 '경사지형과 조선 궁궐의 건축' 논고를 통해 창덕궁을 '경사지 궁궐'로 규정하면서 "창덕궁의 변모 과정은 지형과의 일관된 경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창덕궁이 고전적 궁궐 배치를 따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창건 당시 위상이 이궁이었기 때문에 경복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대지가 좁았다"고 설명했다.

대조전 후원의 화계(花階)는 창덕궁이 경사지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다. 화계는 계단 형태의 화단을 말하는데, 이는 경사진 땅을 조경 요소로 활용한 사례라는 것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 복제본. /연합뉴스

조 교수는 창덕궁이 임진왜란 이후 실질적인 법궁이 되고 많은 시설이 지어지면서 대지 조건의 불리함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1656년 효종이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를 위해 별도로 침전을 건축하는 과정을 소개했다. 당시 장렬왕후는 대조전 서북편의 언덕 위에 있는 수정전에 머물렀는데, 새로운 침전 터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장렬왕후의 침전인 만수전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곳도 높은 지형의 좁은 서쪽 사면이었다.

조 교수는 "차선으로 선택한 곳조차도 남향의 안정적인 입지가 불가능한 상황은 창덕궁의 건축 행위에서 원칙과 지형이 갈등하는 양상을 보여준다"며 "이 시기를 지나면 인정전 서편 영역은 더는 활용할 수 있는 건축부지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조와 순조 대를 지나면 창덕궁의 밀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자연 지세에 순응한 조선 궁궐'이라는 특성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좌식 생활과 순수 목구조를 사용하는 건축 관습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규범을 변용할 수밖에 없었다"며 "창덕궁의 배치법은 원론적으로는 대단히 이질적이지만, 이후 경희궁과 덕수궁의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의 궁궐은 경사지형이라는 건축 조건과 동아시아의 원론적인 규범이 교차하면서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김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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