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현충일(6일)과 6·25전쟁. 6월의 기억은 슬프고 참혹하다. 그 해 여름, 6월의 산하山河는 어두운 핏빛으로 물들었다. 25일 새벽, 분단의 38선을 기습적으로 침략한 북한군의 탱크는 신작로를 가득 채웠고 각종 화기와 대포 등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무차별 발포로 포연은 자욱했다. 포탄과 총성이 이어진 3년1개월에 이르는 긴 전쟁 동안 250만 명 이상의 사망자, 1,000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20세기 역사상 최악의 전쟁 중 하나다.

국방색 초라한 군복에 어떤 계급장을 단 그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누군가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남편이었으며, 어떤 아름다운 여인의 연인이었을, 누군가의 동생, 형님이었을 용사勇士들이 죽어갔다. 보상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여인, 남겨질 아들과 딸, 형제들, 누이들, 고향의 늙은 아버지, 애절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부짖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기억한다.

-집에 가고 싶어요. 어머니, 보고 싶어요.
-나도 전쟁이 싫고 죽음이 두렵소.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오.
-당신을 사랑했소. 울지 마시오.
-전쟁이 끝나면 꼭 다시 돌아오겠소.
-내가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받는다면, 아이들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기시오. 미안하오. 그리고 나를 깨끗이 잊고 재혼을 하도록 하시오.

<보병과 더불어>, 전쟁에 나간 많은 장병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참전한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이 갈렸다. 전선은 길게 남하했고 누군가는 후퇴를 거듭했고, 누군가는 장렬히 전사했고, 누군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누군가는 전쟁영웅이 되었고, 누군가는 무력한 포로가 되었다.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그 참혹한 전쟁에서 우리는 아직도 그 때 사라진 이름들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

<보병과 더불어>, 전쟁에 나간 많은 장병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참전한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이 갈렸다. 전선은 길게 남하했고 누군가는 후퇴를 거듭했고, 누군가는 장렬히 전사했고, 누군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누군가는 전쟁영웅이 되었고, 누군가는 무력한 포로가 되었다. 서로가 이겼다고 주장하는 그 참혹한 전쟁에서 우리는 아직도 그 때 사라진 이름들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

보병과 더불어 / 출처=http://blog.naver.com/maenam111/90155221175

전사자의 유해 송환문제, 전쟁포로와 실종자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미완의 숙제로 남아 있다. 전쟁은 숱한 작전 중 사망(KIA-Killed in action)과 작전 중 행방불명(MIA-missing in action)을 남긴다. 

전투가 중지되거나 전선이 어느 정도 교착상태에 있을 때는 아군의 사망자와 부상자 확인 등의 인명피해 상황의 파악이 쉽지만, 아군이 승리하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패전을 했다면 우리 편 전사자나 행방불명된 전우의 신원 확인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된다. 

특히 패전한 군대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자신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부하나 상관의 생존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전쟁은 산 자나 죽은 자나 똑같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하나의 미궁이다. 

전쟁포로는 고문과 유사한 극한상황에서 전쟁의 심한 후유증이나 기억상실, 공포증,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까지 경험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종자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망자로 처리되나, 귀환하지 못한 우리 병사들은 북한에서 심한 고초를 겪고 현재 생사불명 상태의 노인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북한은 전쟁포로 78,636명(대부분 한국군)에 대해 제네바 협정 등 인도주의 원칙을 위반하고 전후 복구사업 등에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대거 억류하고자 했다(정용봉 박사 《메아리 없는 종소리-국군포로들은 왜 못 돌아오는가?》 참조)는 것이 정설이다.

단 한 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라도 찾아내 가족과 조국에 품으로 귀환시킨다는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의 신조는 국가의 책무와 존재이유를 웅변한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You are not forgotten) 한 명의 병사도 적진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Leave no man behind)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출처=http://biketago.com/etc/?m=view&id=28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영웅들을 찾아내기 위한 JPAC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6.25전쟁에서 발생한 미군의 포로 및 실종자는 약 8,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1995년부터 지금까지 유해 발굴 작업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투입했다. 애국자와 전쟁영웅을 기리려는 이런 모습에서도 미국의 저력이 빛난다. 세계 어느 곳에 벌어진 전선에서라도 만약 포로가 되거나 실종자가 될 경우 미군은 언젠가는 조국인 미국이 자신을 찾아올 것으로 굳게 믿는다. 2003년 창설된 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전쟁, 이라크전쟁 등에서 전사한 미군의 유해와 포로, 실종자들을 찾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는 임무를 철저히 수행한다.

어느 해인가. 월남전이 한창이던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한다. 이웃(부산시 부산진구 전포2동572번지)건물 2층집에 세 들어 살던 어떤 할머니가 어느 날, 월남에 간 아들(중위나 대위 정도의 육군 장교로 기억함)의 전사통지서를 우편배달부에게서 받자마자 쓰러질 듯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통곡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6.25 전쟁 / 위키피디아

오래 전 퇴역한 어떤 용사의 증언이다. “6·25 때 징집되었을 때, 우리는 군번도 없었고, 계급도 없었다. 군번과 계급은 나중에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와 병무청에서 뒤늦게 병적을 정리할 때 받았다. 당시 우리는 무명용사와 마찬가지였다. 전투복, 군화, 군모도 제대로 지급 받지 못했다. M1 소총 제대로 싸보지 못하고, 1주 정도의 속성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에 배치됐다. 

병사들은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밤이면 심하게 흐느껴 우는 병사들도 많았다. 아직도 어린 나이,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것일까. 들리는 대포소리들이 무서웠던가. 죽음의 공포를 실감했기 때문일까. 어떤 순진한 병사들은 아예 울보처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는 일도 있었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방으로 투입되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은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식사 시간에는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기 위해 모든 병사들은 아우성이었다. 밥을 많이 먹었다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특히 워낙 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그 당시 밥 3끼를 챙겨 먹은 기억이 없다. 보통 이틀에 한두 끼를 먹은 것 같다. 주로 간식인 건빵을 많이 먹었다.”

현충원 / 연합뉴스

반전소설反戰小說의 고전, E. M 레마르크(1898~1970)의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전선의 허공을 꽃잎처럼 평화롭게 나르는 나비를 보던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한 방의 총성이 울린 후 전사한다. 젊은 병사는 허망하게 죽지만, 사람들은 사망보험을 생명보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한 것처럼, 전선의 사령부는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전쟁은 위선이며, 장군들의 훈장이나 승패에 관계없이 죽은 병사에게 전쟁은 처참한 절망과 패전의 역사일 뿐이다. 좋은 전쟁, 정의로운 전쟁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모든 전쟁은 나쁜 것이며, 전쟁은 인간에게 지옥이자 죄악이다. 항복한 적 앞에서도, 승리하고서도, 결코 기뻐할 수 없는 전쟁을 군인들은 수행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1945~1946년)의 판결문은 ‘전쟁은 그 본질에 있어서 악이다. 전쟁은 인간이 인간임을 부끄럽게 한다.’고 판시했다.

호국영령, 애국자, 국가유공자가 많아 국립묘지나 현충원에 빈자리가 점차 줄어든다는 것. 그것은 유족에게도, 참배하는 우리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특히 남북 간의 체제경쟁은 그 우열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하나 한반도의 주변과 상공에서는 장거리 로켓이 계속 나르고 북한의 무모하고도 필사적인 핵개발은 우리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지만, 우리에게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DMZ)는 아직도 휴전과 분단의 상징이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아니다. 전쟁이 있어야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일 리가 없다.

아아, ‘나를 잊지 말아요(Forget me not)’라는 안타까운 꽃말을 가진 물망초는 끝내 우리 6월의 꽃이 될 수 없는 것인가.

물망초

6월은 호국보훈의 달. 훌륭한 그대들처럼, 그 어떤 순국殉國은커녕, 그 어떤 자기희생도 감수할 수 있을 자세와 가능성이 없어 더욱 비겁하고 구차해진 우리는 오직 한 다발 꽃을 그들 앞에 놓는 것으로만 그 무거운 뜻을 오래도록 기념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사랑하는 그대는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묻지 말라. 헌화를 바치고, 향을 피우고, 북을 치고, 조종弔鐘을 울리는 것은 숭고한 그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오마주(hommage)일 것이니.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을 한 영웅들의 슬픔과 비극, 상처와 절망에 대해 뒤늦게나마 우리는 묵념의 기도와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고개를 깊이 숙인다. 운명공동체인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의 애국심과 헌신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아아, 오늘의 우리를 위해 죽어간 젊은 용사들이여, 사랑하는 그대는 전쟁이 없는 그 곳에서 이제는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우리는 그들의 비통한 죽음을 가슴에 묻는다. 위대한 시인이자 우국지사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은 <현충일의 노래>로 그들의 나라사랑을 뜨겁게 찬탄한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충혼忠魂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임들은 불멸하는 민족혼의 상징/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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