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연산군(1476~1506)은 생모 폐비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정조(1752~1800)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처참한 비극을 안고 임금으로서 각각 새로운 출발을 했다. 어쨌든 연산군의 어머니는 사사(賜死)되었고 정조의 아버지는 타살되었다. 자살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부모를 잃은 아들과 세손은 결국 죄인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이후에 그들은 각각 정적들을 제거했으나 그들이 선택한 길과 리더십은 폭군과 성군으로 갈렸다. 

<금삼의 피>를 보며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절치부심하던 연산군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당쟁을 이용해 1498년 <조의제문>을 빌미로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부관참시를 저지른다. 정책과 미래, 치국평천하의 대의를 보지 못하고 개인적인 원한과 소아에 집착하며 막중한 국정을 그르쳤다. 불행한 과거와 싸우기만 하면 밝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정조는 지난 어제를 심사숙고하며 내일을 위한 탕평·통합과 개혁이라는 새로운 개혁군주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다. 규장각 설치, 화성 축조 등의 내용과 품격이 높은 정치적 구상의 실천은 조선의 중흥, 르네상스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종화 저 <금삼의 피>

박절하고 협소한 우리 정치판은 어떤 정치를 지향해야 하는가. 연산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또는 정조의 길을 갈 것인가. 정답은, 이론의 여지없이, 뻔해 보인다.

부관참시, 정치보복, 한풀이 등 무참한 언어가 오가는 최근 정치권의 행태는 적폐청산에 대한 과잉충성인지. 자기편이 확실한 어떤 국민만을 과잉대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적폐청산이냐, 정치보복이냐를 둘러싼 여야의 싸움은 점입가경이다. 

정치가 강자독식· 약육강식의 제로섬 게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긴 하나, 살아있는 권력과 죽은 권력이 맞불은 살벌한 형국을 방불케 한다. 이 때가 아니면 언제 하랴. 이번 기회에 부관참시를 하고 아예 삼대를 멸해 폐족(廢族)이라도 만들겠다는 기세의 느낌도 없지 않다.

정치의 이익과 손해는 사람 자체를 크게 변하게 한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서 정계를 은퇴하고 몸을 숨기고 살며 후일 거부를 일군 도주공 월나라 대부 범려는 “구천의 사람됨은 어려움 속에서 근심은 함께 해도 평화로울 때 편안함을 함께 할 사람은 아니다.”라고 한다. 

성호 이익 선생의 조카이자 실학자 이가환의 아버지로, 노론이 아닌 남인이라 등용되지 못했던 이용휴(1708~1782) 선생의 <외손자에게 주는 잠언>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가마솥에 쌀이 넘치면 사람이 쳐내고, 사람에게 벼슬이 넘치면 하늘이 쳐낸다. 득의한 시기는 사람의 의지와 기상을 키우기도 하지만, 사람의 좋은 바탕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

과거 동인과 서인의 분당 이후, 우리나라의 서원은 창설하신 분들의 나라와 백성을 살리자는 고상한 뜻과는 달리 운영되었다. 정권을 잡은 여당과 정권을 잃은 야당의 폐단은 컸다. 서원은 조정(朝廷)의 도구나 기반이자 연장(延長)으로, 역적과 충신을 구분해 누가 이기고 누가 죽느냐는 무서운 글들과 날카로운 칼들이 난무하는 비정한 정치의 현장이었다. 

서원은 유생들의 정견을 수렴· 결집했고 편을 갈라 심하게 싸우게 하는 당쟁의 구심점이자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끊임없이 내부혼란과 국론분열을 부추겼다. 한쪽에서 찬성하면 한쪽에서는 반대했다. 정국이 바뀌면 서로 자파의 대간(臺諫)들을 대거 동원해 상소를 올리고 사약과 능지처참의 극형을 내리게 했다. 

궁극적으로 백성들의 교화라는 좋은 취지에서 출발한 서원은 졸렬한 당쟁의 소굴이 되었다. 자학(自虐)하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혐의가 일부 없지는 않으나, 이런 소모적인 악순환은 100년이 넘도록 반복되었다고 한다. 국력은 계속 악해졌고 끝내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설픈 당파와 설익은 당론 때문에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망친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오늘날 정당의 행태가 과거 서원의 적폐를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도 낯설지 않다. 자신들의 정치적 잇속을 챙기는 데 몰두하는 지금의 여당과 야당들이 벌이는 치열한 당쟁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탓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신흠(1566~1628)은 <검신편>에서 지적한다. "자기의 허물은 살피고, 남의 허물은 보지 않는 것은 군자다. 남의 허물은 보면서 자기의 허물은 살피지 않는 것은 소인이다...자기의 잘못은 용서하고 남의 허물은 살피며, 자기의 허물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남의 허물은 들춰내니, 이야말로 허물 중에 큰 허물이다. 자기의 허물을 능히 고치는 사람은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만하다..." 솥 밑과 가마 밑이 서로 흉을 본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 사돈 남 말 한다 등이 비슷한 맥락이다.

공자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국량이 작고 사심이 많아 소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소인은 편당을 짓고 두루 어울리지 않으며, 이해관계를 따지는 데 밝으며, 교만하여 태연하지 못하며, 언제나 근심 걱정으로 지내며, 모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다.”

정관지치의 명신 위징은 태종에게 말한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소신을 충신(忠臣)으로 만들지 마시고 양신(良臣)으로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태종은 반문한다. “양신과 충신은 뭐가 다른 것이요?” “양신은 스스로 훌륭한 명성을 얻고 군주를 빛나게 하고... 충신은 자신을 소멸시키고 군주도 함께 악명을 얻게 하고...집안과 나라가 모두 화를 당하는데 자신만 충신이라는 미명을 얻어...” 원사위양신(願使爲良臣) 물사위충신(勿使爲忠臣). 사생결단을 감수하고 집권당의 충신이나 실세를 감히 자처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자숙하며 되새겨야 할 《정관정요》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는 소위 촛불혁명을 통해 수립된 정권임을 자주 운위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촛불에 의해 시기적으로 다소 앞당겨졌을 뿐 헌법적 절차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통해 순조롭게 선출되고 집권한 정부다. 헌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권력의 정당성, 합법성, 정통성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다만 오늘의 민주적인 국민, 정치인이나 국회 권력은 출범 초기의 새 행정부에 대해 늘 감시하고 견제하는 방법을 깊이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다.

공칠과삼(功七過三). 현대중국의 그랜드 디자인을 실천한 등소평(1904~1997) 국가주석이 격동의 시기를 살아간 《중국의 붉은 별》 모택동(1893~1976)의 사후에 그의 업적과 인간을 감안해 총체적으로 내린 평가다. 칠실삼허(七實三虛)는 고전 《삼국지》의 흐름을 논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은 고스톱이나 도박판에서의 승리에는 그날의 운이나 재수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회자되는 표현이다.

모택동/ 사진=게티이미지

인간은 누구나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다. 자신이 옳고 총명하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마음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인생과 많은 일들의 향방과 결과는 알 수 없는 우연이나 행운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는 법이다.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은 《성호사설》 <독사료성패(讀史料成敗)>에서 전한다. “천하의 일은 대개 열에 아홉은 요행이다. 역사책에 나오는 고금의 성공이나 실패, 날카로움이나 둔함은 그때의 우연에 따른 것이 워낙 많다. 선과 악, 어짐과 어리석음의 구별이 반드시 그 실지를 얻은 것도 아니다...당시에 훌륭한 꾀가 이루어진 것도 있겠고, 졸렬한 계책이 어쩌다 맞아 떨어진 것도 있을 것이다...천하의 일은 놓여진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이 그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가 된다...”

돌아가는 정치판을 보면, 어떻게 내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까마귀의 암수도 쉽게 가릴 수 없는 것이라고 겸손했던 것이 정계와 학계에서 활약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다. 

양념도 너무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이라는 것도 언젠가는 내려가기 마련이다. 여론조사는 너무 믿을 것도, 일희일비할 것이 못 된다. 하루 종일 오는 소나기 없고, 1년 내내 부는 태풍도 없는 것이 우리 사는 세상이다.

《해동가요》를 편찬한 가객 김수장(1690~?)은 “환욕(宦慾)에 취한 분, 네 앞 길 생각하소. 옷 벗은 어린 아이 양지 곁만 여겼다가 서산에 해 넘어 가거든 어찌하자 하더라.”고 잘 나간다는 벼슬아치들에게 경계를 보냈다. 송나라 승상을 지낸 장상영(1043~1122))의 말씀도 유용한 참고가 된다. “일은 끝장을 보아서는 안 되고 세력은 온전히 기대면 곤란하다. 말은 다 해서는 안 되고 복은 끝까지 누리면 못 쓴다.”

군웅이 할거한 일본의 어지러운 전국을 통일하고 에도막부를 연 도쿠가와이에야스(1543~1616)는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고 했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그의 일화, 또한 의미심장하다.

《장자莊子》에는 목계(木鷄)의 비유가 나온다. 목계는 나무로 만든 닭을 말한다. 사람으로 치면, 흔히 덕(德)이 완숙하여 바보처럼 보이는 존재를 비유한다. 옛날에 투계(鬪鷄)를 아주 좋아했던 왕이 투계 전문가에게 싸움닭을 기르게 하여 훈련을 맡겼다. 

며칠 후 왕이 닭이 자금 싸우러 나가면 어떠냐고 묻자 “아직 아닙니다. 허세로 교만합니다.” 10여일이 지나 다시 묻자 “아직 안됩니다. 다른 닭을 쳐다보고 노기(怒氣)를 띱니다.” 다시 10여일이 지난 후 왕이 준비되었냐고 묻자 “거의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기색이 변하지 않고, 바라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그 덕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승부의 결과는 무심(無心), 심중무검(心中無劍)의 경지에서 온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용맹한 임전무퇴가 항상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인가.

살수대첩의 명장 을지문덕이 수나라 우문중에게 보낸 <여수장우중문시>다.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에 이르렀고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했네. 싸움에 이겨 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칠언절구 <제오강정(題烏江亭)>에서 당나라 말기의 대표적 시인 두목(803~853)은 항우의 패배를 크게 아쉬워한다.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 기약할 수 없으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는 것이 사나이로다. 강동의 자제들에 뛰어난 준재들이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올 것을 알지 못 하네 (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 

권토중래는 ‘흙먼지 일으키며 거듭 온다.’는 말로, 싸움에 한 번 패한 장수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모아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면서 쳐들어오는 장수의 기상이다. 

《사기》 <항우본기>는 사면에서 울리는 초나라 노래에 대한 얘기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데 때가 불리해 오추마 나가지 않는구나. 추가 가지 않으니 어찌 할 것인가.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 하리오.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柰若何) 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모든 진지를 차지하여 사방에서 들리노니. 돌아가자는 초나라의 노래 뿐, 대왕의 뜻과 기운 모두 다하였으니 대왕의 여인으로서 어찌 함께 죽기를 마다 하리오 (漢兵己略地 四方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북송의 여성시인 이청조(1084~1151)는 <하일절구(夏日絶句)>에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호걸 항우가 훗날 한(漢)의 고조가 된 유방과 해하에서 패권을 다투다 패하여 오강(烏江)에서 자결한 것을 오히려 찬탄한다. “살아서는 당연히 호걸이며 죽어서는 또한 귀신들의 영웅이네. 지금에야 그립도다. 강동을 건너지 않으려 했던 항우. (生當作人傑 死亦爲鬼雄 只今思項羽 不肯過江東).”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형국에서 당시 강동의 부형들에게 면목이 없다며 항복이나 준비된 배로 도망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시인의 눈은 크게 다르다. 이처럼 세상사는 보기 나름이다. 어떤 프레임에 갇히면 인식하는 진리도 변한다. 진실과 정의(正義)도 호오나 처지, 입장에 따라 크게 갈린다. 인간은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미인은 오강(烏江) 언덕에서 자결하고 전쟁의 불길은 적벽산(赤壁山)을 불태우고 장군은 늙어서야 옥문관(玉門關)을 지나려하네. 슬프구나, 진나라 한나라 모두 도탄에 빠진 것은 백성들이니 책 읽는 이는 길게 탄식할 뿐이네.” 원·명대 가곡(산곡)의 대가 장가구(1270~?)의 뼈저린 <회고(懷古)>다.

사진= 영화 노무현입니다

아아, 이득과 권세를 탐하는 이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은혜는 돌에 크게 새기고 모든 원한은 저 멀리 강물에 띄어 보내면서 잊어야 한다. 이제는 대국을 보는 관용과 여유, 화해가 더욱 필요해 보인다. 

2009년 5월 23일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도 헤아릴 수 없다...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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