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덕수궁 준명당(浚眀堂)-2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덕혜옹주를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가의 이야기를 하자면 민족의 고난은 어느 특정계급에 국한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망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일개 범부에서 왕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고통 속에서 살아간 흔적이 역사에 남아 있다. 이를 바라보는 후손들의 가슴이 아리어 올 뿐이다. 특히 국가의 정체성의 상징이요 國本 자체인 황실가의 자손들은 아무런 의사결정도 하지 못한 채 승리국의 조종한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학습원시절의 덕혜

일본에 유학을 갔다고는 하지만 어디 그게 유학인가?

볼모로 잡혀간 것이다. 결혼은 철저히 일본의 황족, 화족계급에 한하여졌다. 혼혈정책이다.

엄밀히 말하면 유학과 결혼이라는 미명아래에 저질러진 기만과 인권유린이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일본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해갔으며 막연한 불안 속에서 생명이 서서히 소진되어갔다.

이들에게 왜 민족을 위해 저항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너무 가혹한 것이다. 이제 우리의 가련한 소녀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풀어 보자.

 

1925년 동경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은 덕혜는 이복오빠인 영친왕의 근처의 집에서 생활한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차츰 안정되어 갔다. 일본의 최고 상위층이 다니는 여자학습원은 황족이나 화족의 자녀들만 다니는 고급학교였으며 조선에서 딸려온 시녀들의 시중 속에서 학교 성적도 최우등권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이은 혈육의 죽음은 이역 땅에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자신을 사랑한 친아버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를 보내고...

이복 오빠이지만 친아버지처럼 섬겼던 순종마저 떠나버리고 마음이 지쳐갈 무렵인 1929년 늦가을, 홀로 된 어머니 복령당 양씨의 죽음은 어린 덕혜가 지고가기에는 너무 벅찬 아픔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 가는 것인가? 친구들의 증언에 의하면 덕혜는 등교시 항상 보온병에 물을 넣어 다녔다고 한다. 고종의 독살설 등으로 아마 적국인 일본에서 생활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에 독을 넣어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덕혜의 행동이 이상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흔히 조발성 치매라고 하는데 일종의 정신분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몽유병환자처럼 자다 일어나 걷기도 하고 급우들과의 대화가 없어졌다.

어느덧 나이는 스무살이 되어 가는데..

이때 덕혜의 결혼설이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11황족인 산계궁 등마왕이라는 황족인데.. 어떤 이유인지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아마도 신랑측에서 조선의 황녀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이 있다.

그 이후 새로운 혼처로 등장한 것이 대마도 번주의 후예인 쇼 다케유키 (宗武志)이다. 황족은 아니었으나 대마도는 조선과 가까워 조선인에 대해 잘 아는 섬이었고...

그 섬 영주의 아들이니 조선의 황녀를 잘 이해 할 수 있는 남편감 일 것 이라는 황실가의 배려였을까?

동경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시와 그림에 능한 참 멋진 남자이었던 것 같다.

결혼 이듬해에 딸 정혜가 태어날 때 까지는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 아무런 기록이 없어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사실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남편이 못났거나 무식했다거나 하는 것은 잘못 전달된 것이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덕혜의 마음의 병은 깊어가고 남편의 사랑이 덕혜를 치유하기에는 병이 너무 깊어만 갔다. 딸 정혜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더욱 없다. 아마 조선황녀인 엄마와 일본 화족인 아빠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쇼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식 사진

결국 딸 정혜는 장성하여 결혼 후 1년 남짓 지나서 자살하러 나간다는 메모만 남긴 채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이때는 이미 덕혜는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분열증으로 일본의 외곽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생활할 때이다. 결혼생활을 계속 할 수 없고 2차 세계대전으로 황실과 화족에 대한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남편도 더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 이혼 후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이다.

 

그 후 덕혜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신문 김을한 동경특파원을 통해서다. 한때 어린 덕혜를 일본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종의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을 덕혜의 신랑감으로 내정했었다고하는데.. 그 김장한의 형이 김을한이다.

덕혜옹주 귀국사진

 

<덕혜옹주가 누구요?> 516군사정부가 들어섰을 때 김을한기자의 말에 박정희가 한 질문이다. 군사정부에서 가뜩이나 정통성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조선황녀에 대한 혁명정부의 배려는 국민에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62년 드디어 37년 만에 덕혜가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아무 말도 못하는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해준 사람은 어릴 때의 유모 변복동할머니와 함께 준명당에서 유치원 생활을 했던 소꿉친구들...

덕혜옹주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 이덕혜 이름으로..

일본 유학시 승리국 일본인들이 환영한 것과 마찬가지로 해방을 맞이한 대한민국 국민의 환대는 큰 것이었으나 덕혜는 이것을 누릴 줄 모르는 장애인이었다.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숨을 거뒀을 때 같은 처지의 이방자여사가 한 말이 가슴을 친다.

<어서 눈을 뜨세요. 지금 죽기에는 인생이 너무 슬퍼요>

초라한 회갑연 사진

돌아갈 때까지 단 두 가지의 말만 할 수 있었다. <싫어!>와 <정혜>

<싫어!> 무엇이 싫다는 것인가? 적국 일본에서의 화려한 생활보다는 소박한 조국에서의 삶이 그리웠을까?

<정혜> 한 점 혈육 딸 마사에. 정혜에 대한 그리움이 병을 키워갔을까?

덕혜옹주 영정사진

마음속에 가득 찬 외로움과 그리움을 안고 살다간 덕혜옹주의 슬픈 목소리가 경운궁 준명당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나는 오래 오래 낙선재에서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어요. 대한민국 우리나라’ 정신이 맑았울 때 쓴 덕혜옹주의 글
한선생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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