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호 사건으로 드러난 직장 내 괴롭힘의 심각성...법안 공백 메꿔질 수 있을까

[공감신문] 고진경 기자=남양유업 대리점 갑질부터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그리고 이번 양진호 사건까지. 충격적이고 비상식적인 직장 내 갑질 사건이 계속해서 터지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직장 내 괴롭힘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방증이다.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에 따르면 지난 한 달간 접수된 직장 내 갑질 제보는 1891건에 달한다. 직장에서의 갑질에 지쳐 신고를 하는 이들이 하루 평균 61명이나 되는 것이다.

유형별로는 임금 체불이 가장 많았으며 괴롭힘이나 부당한 업무지시, 고용보험 문제 등이 포함됐다.

직장 내 괴롭힘의 사례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엽기적이고 잔혹한 행위들이 보고됐다. 구체적으로는 소주병을 들로 내리치려는 듯 위협하기, 고객들이 보는 영업장에서 목 조르기, 외투에 넣어둔 생리대를 불쑥 꺼내 직원들 앞에서 흔들어대기, 부하 직원에게 그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허리띠로 내려치기 등이다.

영화에서나 나오던 비상식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괴롭힘의 사유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거나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등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다.

여러 명의 동료사원들이 자신을 제외하고 어울려 다니거나 대화 또는 업무에서 배제시키는 낮은 단계의 따돌림 역시 직장 내 괴롭힘에 속한다. 이렇게 은밀하게 이뤄지는 직장 내 괴롭힘은 당사자가 느끼는 큰 고통에도 불구하고 처벌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적 있는 반면 문제제기나 개선이 이뤄진 사례는 매우 드물다. [freepik]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8~9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만 20~64살 직장인 1506명 중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당한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은 73.3%에 달했다.

괴롭힘 행위자가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77.5%가 상급자라고 답했다. 반면 반발하거나 적절한 대처를 해봤다는 응답자는 극소수였다. 괴롭힘 피해자의 60.3%는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으며 가해자에게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는 응답자는 26.4%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는 응답자는 이보다 적은 12%였다.

더 심각한 것은 문제제기 이후에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했지만 가해자에게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답한 응답자는 절반 이상(53.9%)이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개인적으로 사과했다는 응답은 39.3%로, 회사가 나서서 개선을 노력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피해자들은 문제제기 이후 업무상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입거나(31.1%)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거나(29.5%) 악의적인 소문이 퍼지는 것(26.9%)을 경험해야 했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만연해진 것은 법의 공백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freepik]

이처럼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고질적으로 굳어진 것은 법의 공백이 심각한 탓이 크다. 현행법상으로는 직장 내 괴롭힘을 처벌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 8조가 “사용자는 사고의 발생이나 그 밖의 어떠한 이유로도 근로자에게 폭행을 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폭언이나 갑질 등에 대한 규정은 없는 상태다.

법이 처벌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증거가 명확한 폭행뿐이다. 이 때문에 양진호 한국미래기술 회장의 폭행 외 괴롭힘 역시 처벌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행법상으로 폭언이나 불합리한 지시는 구제받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병원 치료를 받아도 산업재해로 인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심지어 괴롭힘에 지쳐 퇴사를 결정해도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 없는 냉혹한 현실에 처하게 된다. 자발적 퇴사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생계를 저당 잡힌 을들이 갑의 괴롭힘을 견딜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법의 공백은 개인적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7월 정부의 부처합동 발표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연간 4조7800억원의 손실비용이 발생한다. 연봉 3000만원인 노동자 약 16만명의 인건비 수준이다. 피해자의 정신적 피해, 자살로 인한 노동력 손실까지 고려하면 손실비용은 더욱 커진다.

지난 2013년부터 10건이 넘는 직장 내 괴롭힘 관련법이 발의됐지만 그중 국회를 통과한 것은 한 건도 없다.

국회에서 관련 논의가 아예 이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직장 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논의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지난 2013년부터 발의된 관련법만 10건이 넘는다.

지난 2016년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인영·한정애 의원과 민중당 윤종오 전 의원이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했다. 올해에는 정의당 이정미 의원이 ‘직장 내 괴롭힘 예방 및 피해근로자 보호에 관한 법률’ 특별법을 발의했다. 민주당 강병원 의원도 노동위원회법 일부개정안,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 등을 내놨다. 이들 법안에는 공통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 금지행위와 처벌조항 등이 들어있다.

문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지금까지 단 한건의 법안도 통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아직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정확한 정의마저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 9월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정신·정서적 고통을 주거나 업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통과시킨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발목이 잡혀 시행이 불투명하다.

그러나 해당 법안 역시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다.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명확해지고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자유한국당 이완영 의원은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가 매우 불명확하다”며 “법이 시행된다면 사업장에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법안 통과에 제동을 걸었다. 같은 당 장제원 의원도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휩쓸려서 애매한 자구 규정을 정확히 안 한다는 것은 법사위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법안 통과 단계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북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부터 직장 내 괴롭힘 문제에 대한 논의를 해왔다.

직장 내 괴롭힘 조례를 최초로 제정한 스웨덴은 형법으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2002년 노동법과 형법, 공직자규정에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법적 정의와 이를 처벌하는 조항을 도입했다. 특히 입증 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부여해 노동자가 괴롭힘을 주장하면 사용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도록 했다. 사용자는 이를 입증하지 못할 시 징역 2년 및 3만 유로(39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일본은 관련 법률은 없지만 정부기관에서 직장 내 괴롭힘의 정의와 유형을 공포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갔다.

이번 양승호 사건은 심각성과 엽기성으로 우리 사회에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지금이 논의를 진행해 나갈 적기다. 직장 내 괴롭힘이 근로기준법과 형법의 사각지대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만큼 국회는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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