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수도 부산'의 저자 김동현
'천일의 수도 부산'의 저자 김동현

[공감신문] 김동현 칼럼리스트 = 91711월 범일동에 들어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면방직공장인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전국 면(綿) 공급의 30%를 차지한 국내 최대 기업이었다. 종업원이 한때 3천여 명에 달해 공장 안에 기숙사와 병원 시설도 있었기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삼남 각지의 여성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으며, 한때 이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나 하루 10시간씩 솜먼지를 마시며 일하다 면폐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방직공장에서 15년 일하면 죽는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솜 부스러기를 마시며 저임금과 장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이 6차례나 파업투쟁을 벌일 만큼 노동 약탈로 악명 높은 기업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정치권의 줄을 타고 낙하산 경영인들이 번갈아 내려오면서 점차 부실기업으로 전락하더니 19685월 조선방직은 마침내 문을 닫았다.

노동 약탈에 지친 공장 노동자들이 범일동 회사 근방에서 즐겨 먹던 음식은 낙지에 참기름, 고추장을 넣어 요리한 낙지볶음이었으며 한때 범일동 뒷골목은 낙지볶음 거리로 통했다. 요즘도 조방낙지는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그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동구 범일2동 일대를 아직도 조방 앞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부산진시장이 혼수, 섬유, 의류 등 포목점으로 유명한 것도 조선방직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방직은 1930년대 초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군수공장으로 변모했다는 이유로, 조선방직이 있었던 자리 앞길에 붙여진 조방로라는 이름도 바꿔야 한다는 청원이 최근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홍도회(弘道會) 독서구락부 도서실이 19011010일 용두산 아래 동광동에서 문을 열었다. 국민 도덕심 고양과 도의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일본의 홍도회 부산지부가 주도한 이 도서실은 서울과 평양의 공공도서관보다 5년이나 앞섰다. 1911년 시립 부산교육회에서 이 도서실을 인수운영했으며 1919년 부산 부립공공도서관을 거쳐 지금은 부전동의 부산광역시립시민도서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120년이 넘는 부산시민도서관은 귀중한 한일외교자료와 고문헌 자료가 많아 고문헌 특성화도서관으로 지정되었으며 일 년 내내 주제별 고문헌 자료를 상설 전시한다.

이상문학상 추천작인 윤성희의 소설 <그 남자의 책 198>을 동명 영화로 제작한 김정권 감독은 부산시민도서관을 배경 촬영함으로써 이곳이 유명해졌으며, 이 영화는 2008년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었다.

우리나라 민간상업방송의 효시도 1959415일 호출부호 HLKU, 출력 1kw로 개국한 부산문화방송이다. 부산은 일본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권역이었기에 자율성이 많은 상업방송에 남 먼저 눈을 뜨게 되었던 것이다.

부산문화방송은 이승만 정권 말기 3.15 마산의거와 김주열 사건을 중계하다시피 보도함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마침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5.16 군사정권이 정수재단을 설립하여 문화방송 본사를 서울에서 출범시킨 것은 이보다 2년이나 늦은 196112월이다.

서구 문물인 우체국도 부산에서 시작했다.

우리의 전통 통신제도는 불이나 연기로 위급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제도이거나 공문을 빨리 보내는 파발(擺撥) 제도였는데, 1878111일 일본관리청(현 환타지아 모텔 자리)에 일본전용의 우편국 사무소를 열었다.

김옥균의 개화파들이 수구당을 몰아내고자 일으킨 갑신정변 쿠데타의 계기가 되었던 우리나라 우정총국 개국 잔치는 6년 뒤인 18841017일이다.

1876년 개항과 동시에 부산 왜관 선착장과 일본 나가사키 사이를 매월 왕래하는 정기우편선 니나와호(浪花號)는 우리나라 정기항로의 효시다. 18842월 부산과 나가사키 사이 해저전선이 부설됨으로써 전신 업무도 부산이 시초다. 한성전보총국은 이듬해 서울과 인천 간 전신선을 가설하여 전신 업무를 시작했다.

해방 후 미국을 왕래하는 최초 화물선 극동해운의 고려호가 19521021일 부산항 제1부두에 입항했을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나가서 축하연을 벌였다.

부산은 우리나라가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의료보험제도의 선구자인 민간의료보험조합이 최초로 탄생한 곳이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통하는 장기려 박사는 김일성대학 교수였다가 피난지 부산으로 홀로 내려와서 무료 천막병원을 운영했다. 그가 25년 간 운영한 무료진료소 복음병원은 고신대 병원의 전신이다.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상을 받고 오히려 부끄러워했던 그는 옥탑방에서 여생을 보냈다. 성자에 가까운 의사였던 장기려 박사는 병원 문턱을 낮추기 위해 한평생 가난한 이웃을 돌보며 살다간 사회사업 운동가 채규철 씨와 함께 19685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으며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될 때까지 24만여 명의 조합원들이 전국 480개의 지정 의료기관에서 진료 혜택을 받았다.

부산 출신의 또 다른 의사 성자인 이태석 신부 생가가 부민동 골목에 있다. 세 칸 오두막집에서 홀어머니가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니 믿기지 않는다. 생가 뒤편의 천주교 살레시오 수도회의 이태석 신부 기념관에는 남()수단에서의 봉사활동을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가 내방객을 계속 울리고 있다. ‘남수단의 슈바이처였던 이태석 신부는 내전으로 갈등을 겪는 양쪽 진영의 부상병을 모두 치료해주었으며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심리적 치유도 해주었다.

온몸을 바쳐 남을 돕다가 막상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해 마흔여덟 살로 선종한 이태석 신부의 수단 제자들 가운데 의사가 57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시사고발 프로그램 전담 PD출신인 구수환 감독이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년을 맞아 기적과 같은 제자들의 감동적인 스토리를 묶어 영화 <부활>을 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불같은 사랑의 봉사활동을 벌이다가도 심신이 지칠 때마다 근처 호수를 찾아가서 어머님 품과 같은 부산의 바다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나누기엔 가진 것이 너무 적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하찮은 1%가 누군가에게는 100%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이 신부의 명언이 기념관을 나와서도 오랫동안 가슴을 울리게 한다.

부산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의인으로 이수현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수현 씨는 고려대 상대 학생시절인 20011월 일본어 연수차 도쿄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귀가하던 중 신오쿠보역에서 취객이 반대편 선로에 추락하는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일본의 한 평론가는 청년 이수현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이타적 희생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옆집에 누가 사는지 흥미도 관심도 없는 슬픈 일본사회를 반성시켰다고 격찬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으며 그를 추모하는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가 한일합작으로 제작되었다. 27세로 산화한 이수현 씨는 금정구 두구동 영락공원묘지 7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초읍동 성지곡로에는 추모비가 있다. 주인 없는 그의 홈페이지에는 요즘도 네티즌들이 추모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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