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의 수도 부산'의 저자 김동현
'천일의 수도 부산'의 저자 김동현

[공감신문] 김동현 칼럼니스트 = 부산이 식민지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이자 해외 문물의 첫 시험장이었기에,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는 아픔도 많았다.

부산은 일본의 침략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받았기에 항일정신이 강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개인영달을 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부산은 좋든 싫든 일본식 어투와 풍습이 어느 곳보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부산에는 특이하게도 결혼식에 참가한 축하객에게 혼주가 돈 일부를 봉투에 넣어주는데, 이것은 경조사 때 받은 축의금이나 위로금의 절반을 상대방에게 되돌려주었던 일본의 한가에시(半返) 풍습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섬이라면 영도를 떠올리지만 가장 큰 섬은 더덕이 유명하여 이름을 얻은 가덕도이다. 부산 강서지역의 8경 중 두 곳이 가덕도에 있을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맑은 날 대마도가 보이는 가덕도는 조선시대 적군과 대척하는 최전방 군사기지였다.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봉수대의 출발점은 가덕도였으며 임진왜란의 첫 신호도 가덕도 연대산에서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부산은 최전방 지역이었기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임진왜란 첫날부터 왜군이 마지막 철수하는 날까지 일본군의 점령을 가장 오랫동안 받았던 곳이다. 임진왜란 후 통신사가 왕래하면서 일본과는 일단 평화를 유지했으며 공식적인 무역은 두모포왜관에서 이뤄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에 해당하는 두모포왜관이 지금은 수정시장 안에 있지만 당시는 바다를 매립하기 전이라 해안가였다. 조선정부는 임진왜란의 악몽 때문에 일본 사신은 부산까지만 오도록 제한했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 간의 모든 외교통상은 부산에서 행해졌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왜관을 통한 공식적인 거래 외에 가덕도를 거점으로 무기 밀매가 행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에도 막부(幕府)1667년 후쿠오카 상인이었던 이토 코자에몬(伊藤小佐衛門)이 주도한 나가사키 무기 밀매단 93명을 적발하여 주범 43명과 가족들은 처형시키고 50명은 추방하는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무기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던 시절이라 무기 밀수사건은 에도 막부 초기의 최대 스캔들이었다.

수차례 전란을 통해 신무기의 필요성을 절감한 조선은 오랑캐인 청나라에 대한 북벌 야심을 갖고 있었기에 조정의 묵인 아래 무기 밀거래가 이뤄졌던 것이다. 조선 관리가 개입한 밀수 사건이라 일본의 항의가 워낙 심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보다 넓은 지역인 초량으로 왜관을 옮겨주었다.

가덕도는 신라시대 당나라와 교류하던 무역항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통상의 중심지였던 반면, 왜구가 부산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임진왜란 시기에는 일본이 이곳에 왜성을 쌓고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흥선대원군이 1871서양 오랑캐 침범을 막자.”는 척화비를 여기에 세울 정도로 가덕도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외세 침입을 막으려 했던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04년 말 러시아와 전쟁 수행을 위해 가덕도 남단 외양포에 거주하던 주민 64가구를 몰아내고 진해만 요새 사령부를 이곳으로 이전시켰다. 일본군은 이주에 반대하던 외양포의 양천허씨 집성촌을 총칼로 위협하면서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고향을 빼앗긴 주민들은 고개 너머 대항마을로 집단 이주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영토를 자기네 군사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와 벌일 해전에 대비하여 엄폐 막사 2개소, 탄약고 3개소, 280밀리 유탄포 6문을 가덕도에 배치했다. 이듬해 일본의 쓰시마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격파시키는 데 외양포 사령부의 포병대대가 큰 기여를 했다.

외양포에서 쫓겨난 원주민들이 4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 있지만, 외양포에는 아직도 일본군 막사와 탄약고, 포대, 우물 등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의 전쟁 흔적이 박제된 모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요즘 가덕도는 폴란드의 유태인 집단학살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나 뉴욕의 9.11 테러장소인 그라운드제로처럼 비극의 역사현장을 찾는 다크 투어(dark tour) 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비록 일제 강점기 군수품 운반을 위해 구축된 길이기는 하지만 외양포 포대와 말길은 괴정동 샘터공원에 있는 수령 600년의 회화나무와 함께 부산 최초로 국가산림 문화자산으로 지정되었다. 말길이 아픈 역사를 담고 있지만 석축기술과 산길 개설방법에 대한 연구를 위해 보존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신공항 건설지역으로 각광받고 있는 대항마을은 육수장망이라고 하는 가덕도 전통 어로법으로 숭어를 잡고 있다. 초여름쯤 플랑크톤이 많은 낙동강 하류의 민물 냄새를 맡고 떼 지어 오는 숭어는 육질이 부드럽고 향긋한 단맛이 나기에 가덕도 숭어를 으뜸으로 친다. “숭어 누웠다가 간 자리의 뻘도 달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숭어는 맛이 워낙 좋아서 한자로는 빼어난 생선인 수어(秀魚)로 표기한다.

소리와 냄새에 예민한 숭어 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를 젓는 목선 6척으로 원을 그려 그물을 깔아놓고 기다린다. 배의 위치에 따라 밖목선, 안목선, 밖잔등, 안잔등, 밖귀잡이, 안귀잡이 등 각각 이름이 있다. 어로장이 산 위의 망루에서 지켜보다가 신호를 보내면 한꺼번에 그물을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이렇게 잡은 숭어는 상처와 스트레스가 적어 맛이 뛰어나고 싱싱함을 오래 유지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숭어 떼가 몰려오면 망대에서 원격 조종하여 기계로 그물을 올리고 있다.

겨울철이 되면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 바다에는 대구가 제철이다. 가덕 대구는 조선시대 진상품이었기에 그 자부심을 부활시켜 2015년부터 매년 겨울이면 가덕 대구축제를 벌이고 있다.

부산 하면 갈매기가 연상되지만 가덕도에는 솔개가 겨울 철새에서 텃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전국의 들판과 야산을 굽어보며 하늘을 맴돌던 천연기념물 솔개가 농약이나 쥐약 살포 등으로 들쥐나 개구리 같은 먹이사슬이 오염되자 부산 일대의 수산물 찌꺼기에 의지하면서 가덕도에 토박이 살림을 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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